최종 제목: 67세 이혼 후 재회: “15년간 증오했던 남편이, 시한부 선고와 함께 돌아왔다” (반전 스토리) – Tái ngộ sau ly hôn tuổi 67: “Người chồng tôi hận thù suốt 15 năm đã trở về cùng với án tử hình”

제1막 – 1부

겨울 무를 써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다. 사각. 사각. 도마 위에 칼날이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단단하고 서늘한 감촉. 나는 그 규칙적인 리듬이 마음에 든다. 부엌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제법 매섭다. 보일러 온도를 올릴까 하다가 그만둔다. 나 혼자 사는 집에 훈기는 사치다. 오히려 이 서늘한 공기가 정신을 맑게 해준다.

내 이름은 박옥자. 올해로 예순일곱이다. 이 동네에서 ‘옥자네 반찬가게’ 주인으로 불린 지 벌써 십오 년이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억척스러운 할머니라고 생각한다. 새벽 네 시면 어김없이 시장에 나가 가장 싱싱한 채소를 고르고, 하루 종일 멸치를 볶고 김치를 담그니까.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내가 이 노동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노동은 배신하지 않는다. 땀을 흘린 만큼 정직하게 대가를 돌려주고, 몸을 고단하게 만들어 잡생각을 없애주니까. 잡생각. 그렇다. 나는 잡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산다. 특히 십이월, 이렇게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더욱 그렇다.

“아이고, 사장님. 오늘도 늦게까지 하시네.” 가게 앞을 지나가던 세탁소 김 씨가 문을 빼꼼 열고 인사한다. 나는 덤덤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내일 주문받은 게 있어서요. 들어가세요.” 김 씨가 사라지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썰어놓은 무에 굵은 소금을 뿌렸다. 하얀 무 위에 하얀 소금이 눈처럼 내려앉았다. 숨이 죽기를 기다리는 시간. 나는 식탁 의자에 앉아 미지근하게 식은 보리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 시간의 고요함이 나는 참 좋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고,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릴 필요도 없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기다리며 속을 태울 필요도 없는 시간. 십오 년 전, 나는 이 평화를 얻기 위해 내 인생의 절반을 도려냈다. 이혼. 예순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이혼 도장을 찍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변에서는 다들 미쳤다고 했다. 남자가 바람 좀 피울 수도 있지, 늙어서 주책이다, 참고 살면 다 지나간다… 하지만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참기 싫었다. 평생을 건설 회사 사모님으로, 현모양처로, 그림자처럼 살았던 내가 처음으로 낸 목소리였다. 그는 떠났다. 아주 당당하게.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와 함께, 내가 싸준 짐 가방을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그날도 오늘처럼 눈이 내렸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다짐했었다. 다시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당신을 보지 않겠노라고.

시계가 저녁 여덟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흘러간 옛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평화롭다. 이 완벽한 고요함. 내가 직접 쌓아 올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의 성. 나는 이 성의 유일한 주인이었다.

딩동.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칼을 쥐던 손이 움찔했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택배인가? 아니, 시킬 물건이 없다. 세탁소 김 씨가 뭘 두고 갔나? 나는 앞치마에 물기를 닦으며 인터폰으로 향했다. 화면은 어두웠다. 가로등이 고장 났는지, 대문 밖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그 어둠 속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남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누구세요?” 내 목소리가 인터폰을 타고 차갑게 울렸다. 대답이 없다. 잘못 눌렀나 싶어 끄려는데,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화면의 노이즈 때문에 얼굴이 흐릿하게 찌그러져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그 사람은 지금쯤 강남의 펜트하우스에서 떵떵거리고 살고 있을 텐데. 아니면 해외 골프 여행이라도 갔겠지. 이런 허름한 동네, 낡은 주택가에 나타날 리가 없다.

하지만 내 손은 이미 떨리고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물었다. “누구시냐고요.”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마치 긁힌 레코드판처럼 거칠고 갈라져 있었다. “…옥자야.”

세상이 멈췄다. 부엌에서 들리던 냉장고 모터 소리도, 라디오 노랫소리도, 내 심장 소리마저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십오 년 만에 듣는 이름. 누구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은 사장님이라 부르고, 친구들은 박 여사라 부른다. 나를 ‘옥자’라고 부르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다. 김철수. 나의 전남편. 내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고 떠나버린 남자.

나는 현관문으로 달려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문을 열어줘서는 안 된다. 절대. 그가 왜 왔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일일 리가 없다. 돈이 필요해서 왔나? 아니면 늙고 병들어서 수발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건가? 어느 쪽이든 나는 받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나는 인터폰을 향해 소리쳤다. “돌아가세요! 여기 당신이 찾을 사람 없습니다!” 손가락이 끊기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더 작고, 떨리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그 한마디가 내 손가락을 멈추게 했다. 배가 고프다니. 천하의 김철수가, 자존심 하나로 먹고살던 그 남자가, 전처의 집 대문 앞에서 배가 고프다고 말한다고?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장난치나. 나를 놀리려고 온 건가. 하지만 인터폰 화면 속의 그는 장난을 칠 몰골이 아니었다.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고, 입고 있는 코트는 깃이 다 헤진 낡은 것이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화면 속으로 하얀 눈송이들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대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마치 버려진 짐짝처럼.

나는 갈등했다. 이성적으로는 경찰을 부르거나 무시해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내 몸속에 깊이 박혀 있는, 어쩔 수 없는 ‘밥 짓는 여자’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그는 일흔하나다. 이 추운 날씨에 밖에서 떨고 있는 노인이다. 아무리 원수라도, 밥 한 끼 정도는 먹여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궁금했다. 그 위풍당당하던 남자가 도대체 어떻게 되었기에 저런 꼴로 나타났는지. 그 비참한 꼴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잔인한 호기심도 있었다.

철커덕. 나는 결국 대문 개폐 버튼을 눌렀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마당에 들어선 그는 인터폰 화면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한때 윤기가 흐르던 백발은 떡이 져서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검버섯과 주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명품만 고집하던 그는 어디서 주워 입은 듯한 헐렁한 등산 바지에, 밑창이 다 닳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에는 낡아 빠진 검은색 여행용 가방 하나를 소중한 보물단지처럼 꼭 껴안고 있었다.

우리는 마당 한가운데서 마주 섰다. 십오 년이라는 세월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들어와요.” 내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는 안도한 듯 깊은 숨을 내쉬었다.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내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쭈뼛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에게서 냄새가 났다. 오랫동안 씻지 않은 몸 냄새, 퀴퀴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거리의 매연 냄새. 그것은 가난의 냄새였고, 몰락의 냄새였다. 나는 코를 막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거실 불빛 아래서 본 그의 모습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고, 손은 쉼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신발을 벗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허리를 굽히다가 휘청거리는 그를 잡아주려다 나는 손을 거두었다. 내가 왜. 나는 그럴 의무가 없다. 그는 간신히 신발을 벗고 거실 바닥에 발을 디뎠다. 따뜻한 온기가 발바닥에 닿자 그는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낡은 가방은 내려놓지 않았다.

“밥… 줘.” 그가 식탁을 보며 말했다. 염치도 없다. 들어오자마자 밥 타령이라니. 나는 턱으로 식탁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요. 있는 것만 줄 테니까.” 나는 부엌으로 가서 밥솥을 열었다. 다행히 저녁에 해둔 밥이 조금 남아 있었다. 국을 데울 시간도 아까웠다. 찬장에 있던 미역국을 냄비에 붓고 가스 불을 켰다. 냉장고에서 멸치볶음, 콩자반, 그리고 잘 익은 김치를 꺼내 접시에 담았다. 내가 매일 파는 반찬들이다. 그가 가장 싫어했던, 냄새나고 촌스러운 반찬들. 그는 항상 스테이크나 파스타, 아니면 고급 일식집 요리를 좋아했었다. 이런 걸 줘도 먹을까? 안 먹으면 그만이지. 나는 퉁명스럽게 밥상을 차렸다.

쟁반을 들고 식탁으로 가니, 그는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그의 앙상한 목덜미를 보자 기분이 묘했다. 저 목덜미에 빳빳한 와이셔츠 깃을 세워주고 넥타이를 매주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그는 태산처럼 커 보였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저 늙고 지친 짐승 같다. “드세요.” 탁, 하고 쟁반을 내려놓는 소리에 그가 화들짝 놀라 깼다. 눈앞에 놓인 하얀 쌀밥과 김치를 보자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마치 며칠 굶은 짐승처럼, 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손이 먼저 나갈 뻔했다. 그는 허겁지겁 숟가락을 들어 밥을 퍼 넣기 시작했다. 씹지도 않고 삼키는 것 같았다. 국물이 턱을 타고 흘러 옷깃을 적셨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후루룩, 쩝쩝. 그 소리가 너무 적나라해서 나는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품위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모습. 천박하다는 생각보다는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천천히 먹어요. 체하겠네.”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간 말이었다. 그는 내 말을 들은 건지 만 건지, 밥그릇에 코를 박고 계속 먹어 댔다. 그때 내 눈에 그의 손이 들어왔다. 숟가락을 쥔 오른손 손등에 길게 난 흉터. 삼십 년 전, 내가 실수로 깨진 꽃병 조각을 치우다 그를 다치게 했던 상처다. 그때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며 나를 밀쳤었다. ‘재수 없게 아침부터 피를 보게 해!’ 그 독한 말들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그 흉터만은 그대로 남아 시간의 증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저 흉터만 아니었다면, 나는 이 남자가 내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밥 한 공기를 눈 깜짝할 사이에 비웠다. 그리고는 빈 그릇을 숟가락으로 벅벅 긁었다. 더 달라는 뜻이었다. 나는 말없이 밥솥에서 남은 밥을 전부 퍼서 그릇에 담아주었다. 두 번째 공기도 절반쯤 비우고 나서야 그의 숟가락질이 느려졌다. 그는 이제야 살 것 같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탁했다. 총기 넘치던 옛날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초점이 흐릿하고 멍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나를 섬뜩하게 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지만, 나를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투명 인간을 보는 듯한 시선.

“맛있다.” 그가 중얼거렸다. “진짜… 맛있다.” 그 말에 내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했다. 칭찬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진심이 너무나 절박해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남자는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먹고살았던 걸까. 어떤 밥을 먹었기에, 내 가게에서 가장 흔하게 파는 김치와 멸치볶음을 먹고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걸까.

식사가 끝났다. 이제 약속대로 그를 내보낼 시간이다. 나는 빈 그릇을 치우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 먹었으면 이제 가요. 택시비는 줄 테니까.”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 하지만 그는 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그 낡은 가방을 가슴에 더 꽉 끌어안으며 웅크렸다. 마치 그 가방이 그의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갈 데가… 없어.” 그가 작게 속삭였다. “뭐라고요?” “다 잃었어. 집도, 돈도, 사람도… 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그래서요? 나보고 어쩌라고요? 십오 년 전에 제 발로 나간 사람이 이제 와서 갈 데 없다고 하면 내가 받아줘야 해요?”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참았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가 잘살고 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럼 나는 그를 마음껏 미워하고 저주하며 내 남은 인생을 꼿꼿하게 살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다 망가진 꼴로 와서 내 발목을 잡으려 하다니. 이건 비겁하다. 끝까지 이기적인 인간이다.

“하루만…” 그가 식탁 아래로 스르르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오늘 밤만… 재워줘. 밖에 너무 추워. 나가면 죽을 것 같아.” 그의 무릎이 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김철수가 무릎을 꿇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그는 하늘이 무너져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위인이었다. 사업이 부도날 위기에서도 은행장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호통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늙고 병든 개처럼 내 앞에 엎드려 빌고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정심보다는 공포가 앞섰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바닥으로 떨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나? 범죄라도 저지른 건가? 그를 받아주는 순간, 내 평화로운 일상이 산산조각 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창밖에서는 바람 소리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눈보라가 창문을 덜컹거리며 흔들었다. 지금 그를 내쫓으면 그는 정말 객사할지도 모른다. 내 집 문 앞에서 전남편이 얼어 죽었다는 뉴스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딱 하룻밤이에요.”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일 날 밝으면 바로 나가요. 알았어요?” 그는 대답 대신 바닥에 이마를 대고 흐느꼈다. “고마워… 고마워, 옥자야…” 그의 등은 앙상하게 굽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작은 방에 이불 깔아줄 테니까 씻고 자요. 냄새나니까.”

나는 그를 욕실로 밀어 넣고 수건과 칫솔을 던져주었다. 욕실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나는 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그의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가죽 가방.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지퍼 손잡이 하나는 떨어져 나간 낡은 가방. 그는 욕실에 들어가면서도 저 가방을 문 앞에 두었다. 마치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할까 봐 감시하듯이. 도대체 저 안에 뭐가 들었길래. 돈다발? 아니면 훔친 물건? 궁금했지만 손대지 않았다.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는 것이 나의 철칙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가방을 열면 판도라의 상자처럼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튀어나올 것 같아 두려웠다.

샤워를 마친 그가 나왔다. 내가 내어준 죽은 아버지의 낡은 잠옷이 그에게는 너무 컸다. 소매를 두 번이나 접어 올린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는 젖은 머리를 털지도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작은 방으로 가요. 난 안방에서 잘 거니까 얼씬도 하지 말고.” 나는 쌀쌀맞게 쏘아붙이고 안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철컥. 잠금장치를 두 번이나 확인하고서야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오 년 전에 헤어진 남편이 누워 있다. 이 기막힌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분노, 연민, 황당함,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감.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밤이 깊었다. 새벽 두 시쯤 되었을까.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걷는 소리. 나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가 깼다. 혹시 돈 될 만한 것을 찾고 있나? 아니면 냉장고를 뒤지나? 나는 야구방망이를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거실은 어두웠지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 때문에 희미하게 윤곽이 보였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잠옷 바람으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품에는 여전히 그 낡은 가방이 안겨 있었다. 그는 가방을 어루만지며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입 모양을 살폈다. 울고 있었다.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어깨가 격렬하게 들썩였지만, 입 밖으로는 짐승의 신음 같은 소리만 새어 나왔다.

“미안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하다… 내가… 내가 잊어버리면 안 되는데…” 무엇을? 무엇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말인가? “기억해야 해… 기억해야 해, 철수야…”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쿵, 쿵, 쿵. 자해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안 돼… 지워지면 안 돼…”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단순히 사업에 실패해서 도망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저건 공포에 질린 사람의 모습이다. 자신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의 절규였다. 그의 혼잣말은 계속되었다. “옥자야… 우리 옥자… 고생만 시키고…” 내 이름이 나오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허공을 보며, 과거의 유령과 대화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내일 아침이 밝아도 그를 내보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 남자는 지금 무언가와 싸우고 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끝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어둠 속에서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나의 평화로운 겨울은 오늘 밤으로 끝났다. 내 인생에 다시 한번, 지독하고 시린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문은 열렸고, 그는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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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막 – 2부

아침은 늘 그렇듯 무심하게 밝았다. 밤새 내린 눈이 마당에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을 뜨자마자 천장의 낯익은 얼룩이 보였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어젯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거실. 거기에 그가 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소파 위에는 개어놓은 이불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갔나? 새벽같이 도망치듯 나간 건가? 안도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래, 잘된 일이다. 제 발로 나갔으니 내 마음도 편하고, 성가신 일도 없을 테니까. 나는 부엌으로 가 물을 마시려 했다. 그때였다. 마당에서 슥, 슥 하는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그가 있었다. 어제 입고 온 그 얇은 코트 차림으로, 마당의 눈을 쓸고 있었다. 빗자루를 잡은 손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그는 빗자루질 한 번에 숨을 헐떡였고, 휘청거렸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눈을 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필사적으로 비를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는, 그 낡은 가방이 그림자처럼 놓여 있었다.

나는 혀를 찼다. “아침부터 뭐 하는 짓이야.” 창문을 닫으려는데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어젯밤의 그 음울하고 공포에 질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일어났어? 눈이 많이 와서… 손님들 오기 불편할까 봐.” 손님? 아, 반찬가게 손님들을 말하는 건가. 십오 년 전, 그는 내 가게에 발 한 번 들인 적이 없었다. 반찬 가게 사장 남편이라는 타이틀이 쪽팔린다며, 동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내 손님들을 걱정하며 눈을 쓸고 있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나는 외투를 걸치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만해요. 그러다 쓰러지면 약값이 더 들어.” 내가 빗자루를 뺏으려 하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아냐, 다 했어. 밥값은 해야지.” 밥값. 그 단어가 내 가슴을 쿡 찔렀다. 대한민국 건설 업계를 주름잡던 김철수 사장의 입에서 밥값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그는 빗자루를 벽에 세워두고 쭈뼛거리며 섰다. “이제… 갈게.” 그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갈 곳도 없다면서. 어디로 가려고. 그의 시선이 대문 밖을 향했지만, 발은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낡은 운동화는 눈에 젖어 축축해 보였다. 저러고 나가면 동상 걸리기 딱 십상이다.

“아침은 먹고 가요.”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갔다. 이놈의 입이 방정이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도 돼?” “어차피 해 둔 밥, 버리기 아까워서 주는 거예요.”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침 식탁은 어젯밤보다 더 어색했다. 날이 밝으니 그의 늙고 초라한 행색이 더 적나라하게 보였다. 셔츠 깃의 때, 손톱 밑의 까만 때, 그리고 듬성듬성 빠진 머리카락. 그는 국을 떠먹으며 연신 눈치를 살폈다. “옥자야, 반찬이 참 맛있다. 옛날엔 왜 몰랐을까.” “옛날엔 입이 고급이셔서 이런 풀떼기는 쳐다도 안 봤으니까요.” 내 비꼬는 말투에도 그는 허허 웃었다. “그랬지. 내가 미쳤었지.” 그의 순순한 인정에 오히려 내가 말문이 막혔다. 싸움을 걸어도 받아주지 않으니 김이 샜다. 그는 밥그릇을 싹 비우고는 물 컵을 두 손으로 쥐었다. 따뜻한 온기를 느끼려는 듯했다.

“저기… 며칠만 더 있으면 안 될까?” 그가 어렵게 입을 뗐다. 나는 설거지하던 손을 멈췄다. 올 것이 왔다. “이유가 뭐예요?”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그냥… 갈 데가 없어서 그래. 날 좀 풀리면 나갈게. 창고방이라도 좋아.” “돈 필요해요?” 내 질문에 그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냐, 돈은 필요 없어. 그냥… 재워만 줘.” 거짓말. 세상에 돈 필요 없는 거지가 어디 있나. 하지만 그의 눈빛은 묘하게 진지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눈빛. 어젯밤 그의 혼잣말이 떠올랐다. ‘기억해야 해.’ 도대체 무엇을 기억하려고 여기 머물겠다는 건가.

나는 고무장갑을 벗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조건이 있어요.”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첫째, 가게 일 방해하지 말 것. 둘째, 내 생활에 간섭하지 말 것. 셋째, 밥값은 노동으로 때울 것.”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 뭐든 시켜만 줘.” “그리고 마지막.” 나는 그의 가방을 가리켰다. “저 가방, 냄새나니까 좀 빨든지 버리든지 해요.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그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가방을 끌어안았다. “이건 안 돼. 이건… 내 목숨이야.” 목숨? 다 낡아빠진 가방이 목숨이라니. 기가 찼지만 더 묻지 않았다. “알아서 해요. 대신 내 눈에 띄지 않게 방구석에 처박아 둬요.”

그렇게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이혼한 전남편과의 동거라니. 동네 사람들이 알면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나는 그에게 철저하게 ‘일하는 아저씨’ 행세를 시키기로 했다. 다행히 가게는 집과 붙어 있어서 그가 밖으로 나돌 일은 별로 없었다.

그는 생각보다 부지런했다. 아니, 부지런하려고 애를 썼다. 새벽같이 일어나 마당을 쓸고, 무거운 배추 박스를 나르고, 파를 다듬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실수가 잦았다. 다듬어 놓은 파를 엎지르거나, 소금과 설탕을 헷갈리거나, 멀쩡한 그릇을 깨트렸다. 그럴 때마다 그는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미안해, 옥자야. 내가 왜 이러지… 손이 미끄러졌어.” 옛날의 그라면 불같이 화를 내며 남 탓을 했을 텐데. 지금의 그는 죄지은 강아지처럼 내 처분만 기다렸다. 그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나는 그를 야단치는 대신 묵묵히 뒷수습을 했다. 그가 늙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늙으면 둔해지니까.

오후가 되자 가게에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단골인 영희 엄마가 구석에서 마늘을 까고 있는 그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 사장님. 저 아저씨는 누구야? 새로 사람 썼어?”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 네. 시골에서 온 먼 친척이에요. 갈 데가 없어서 당분간 일 좀 도와주기로 했어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남편이라고 하기엔 너무 부끄러웠고, 전남편이라고 하기엔 설명이 복잡했다. 영희 엄마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쯧쯧 혀를 찼다. “사람이 영 맹하게 생겼네. 일은 잘해?” “그냥… 힘쓰는 일이나 시키죠, 뭐.” 그는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묵묵히 마늘만 까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마늘 독 때문에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평생 펜대만 굴리던 손으로 저 독한 마늘을 까고 있다니. 나는 왠지 모를 죄책감에 그에게 다가가 알이 굵은 장갑을 던져주었다. “끼고 해요. 손 다 상해.” 그는 나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 그 웃음이, 십오 년 전 연애 시절의 그 미소를 닮아서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녁이 되었다. 가게 문을 닫고 정산을 하는데, 그가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거지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두라고 했잖아요. 내가 한다니까.” 나는 소리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고무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접시를 닦고 있었다. 거품이 잔뜩 묻은 접시가 그의 떨리는 손안에서 위태로워 보였다. “아냐, 밥값은 해야지.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그가 고집을 부렸다. 그때였다. 미끌. 그의 손에서 접시가 빠져나갔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사기 접시가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내가 못 살아!” 그는 얼어붙은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단순히 그릇을 깬 것에 대한 당황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자신의 신체를 통제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깊은 절망.

“비켜요! 다친다니까!” 나는 그를 밀쳐내고 빗자루를 가져왔다. 그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 손이… 내 손이 아니야…”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파편을 쓸어 담으며 쏘아붙였다. “나이 먹으면 다 그래요. 힘 빠져서 그런 걸 뭘 그렇게 심각하게 굴어요.” 하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그의 떨림은 정상적인 노화가 아니라는 것을. 숟가락을 쥘 때도, 빗자루를 잡을 때도, 그의 손은 미세하게 계속 떨리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인가? 아니면 파킨슨병? 불안한 생각이 스쳤지만 애써 무시했다. 내가 알 바 아니다. 그는 어차피 곧 떠날 사람이다. 정에 이끌려 그의 병수발까지 들 수는 없다.

소동이 정리되고 우리는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는 기죽은 듯 밥만 깨작거렸다. 나는 일부러 텔레비전 볼륨을 높였다. 뉴스에서는 연말 불우이웃 돕기 성금 모금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화면 하단에 날짜가 보였다. 12월 15일. 올해도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식사 후, 나는 그가 머무는 작은 방 앞을 지나다 문이 살짝 열린 것을 보았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방 안의 불을 끄고 스탠드 하나만 켜 놓은 상태였다.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서 발걸음을 멈추고 훔쳐보았다. 그는 가방에서 작은 수첩과 탁상 달력을 꺼내 놓고 있었다. 그리고 빨간색 볼펜으로 달력의 날짜 하나를 동그라미 치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정확히 며칠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매우 신중하고 엄숙했다. 그는 동그라미 친 날짜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한참을 쳐다보았다. 마치 그날이 세상의 종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는 수첩을 펼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꾹꾹 눌러쓰는 모습. 글씨를 쓴다기보다 새기는 것 같았다. 그는 한 줄을 쓰고는 가슴을 치며 한숨을 쉬었다. 답답해 보였다.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쓰기 힘든 내용인 걸까? 잠시 후, 그는 수첩을 덮고 다시 그 낡은 가방 깊숙한 곳에 달력과 수첩을 숨겼다. 그리고는 가방 지퍼를 채우고, 자물쇠까지 채웠다. 철저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

나는 조용히 내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 날짜. 그가 동그라미 친 날짜는 언제일까? 그리고 그 수첩에는 도대체 뭐가 적혀 있을까? 확실한 건, 그가 단순한 빈털터리 노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목적이 있어서 왔다. 그리고 그 목적은 시간과 관련이 있다.

다음 날, 나는 가게 일을 하면서도 계속 그를 주시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마늘을 까고, 파를 다듬었다. 하지만 가끔 허공을 응시하며 멍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그에게 말을 걸어 현실로 불러와야 했다. “거기, 파 뿌리 너무 많이 자르지 마요.” “어? 어… 알았어.” 그는 깜짝 놀라며 다시 가위를 잡았다.

오후 늦게, 낯선 승용차 한 대가 가게 앞에 멈춰 섰다. 검은색 세단. 이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차였다. 나는 긴장했다. 차 문이 열리고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내렸다. 그는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어서 오세요.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나는 손을 닦으며 물었다. 남자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구석에 앉아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서 남자를 보지 못했다. 남자의 눈빛이 번뜩였다. “찾았다.”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앞을 막아섰다. “누구세요?” 남자는 나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김철수 씨, 여기 계시죠?”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빚쟁이인가? 그가 도망쳐 온 이유가 역시 돈 때문이었나? “그런 사람 없는데요.” 나는 딱 잡아뗐다. 하지만 남자는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거짓말하지 마시죠. 저기 앉아 계신 분, 김철수 씨 맞잖아요.” 남자가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보! 도망쳐!”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여보’라는 호칭. 십오 년 동안 입 밖으로 낸 적 없던 그 단어가 위기의 순간에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남자와 마주쳤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공포. 그것은 명백한 공포였다. 그는 벌벌 떨며 뒷걸음질 치다 의자에 걸려 넘어졌다. “오… 오지 마…” 그가 바닥을 기며 뒷걸음질 쳤다. “나 돈 없어… 다 줬잖아… 제발…”

남자는 멈춰 서서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명함이었다. “김철수 회장님, 오해십니다. 저는 사모님이 보낸 사람입니다.” 사모님? 그 젊은 내연녀를 말하는 건가? 나는 멍해졌다. 그는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 난 그런 사람 몰라… 가! 가란 말이야!” 그가 발광하듯 소리치며 옆에 있던 소금 자루를 남자에게 집어 던졌다. 하얀 소금이 공중에 흩날렸다. 가게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남자는 소금을 뒤집어쓴 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 진정하십시오. 사모님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내 마누라는 여기 있어! 박옥자가 내 마누라야! 딴 년은 몰라!” 그가 나를 가리키며 악을 썼다. 그 순간, 가게 안의 정적이 흘렀다. 나도, 남자도, 그리고 가게 밖에서 구경하던 동네 사람들도 모두 얼어붙었다. 그의 외침은 너무나 생생하고 절박해서, 마치 십오 년 전의 이혼이 없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아… 전 사모님이시군요.” 그 말투에는 경멸인지 동정인지 모를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가요. 당장.” 나는 식칼을 도마에 쾅 찍으며 말했다. “내 가게에서 행패 부리지 말고 나가라고요!” 내 기세에 눌린 남자는 뒷걸음질 쳤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올 겁니다. 회장님, 그때까지 건강하십시오.” 남자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차에 탔다. 검은 세단이 사라지자, 가게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그는 구석에 처박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소금 범벅이 된 그의 모습이 처참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화가 났다. 그가 빚쟁이에게 쫓기는 게 아니라, 내연녀가 보낸 사람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그 여자와 엮여 있는 건가. “일어나요.” 나는 차갑게 말했다. 그는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일어났다. “미안해… 옥자야…” “설명해요. 저 사람 뭐예요? 그 여자가 왜 당신을 찾아요? 다 잃었다면서요.” 내 추궁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기억이… 안 나.” “뭐라고요?” “진짜야. 기억이 안 나… 내가 왜 도망쳤는지… 저놈이 누군지…” 그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거짓말. 또 거짓말이다. 아까는 돈 다 줬다고 소리쳤으면서, 이제 와서 기억이 안 난다니.

“당신, 정말 구제 불능이네.” 나는 싸늘하게 내뱉고 돌아섰다. 그를 믿은 내가 바보다. 그는 여전히 십오 년 전의 그 교활한 김철수다. 불리하면 회피하고,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비겁자. 하지만 내 등 뒤에서 들려온 그의 중얼거림이 나를 멈춰 세웠다. “진짜야…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어… 자꾸만 지워져… 옥자 얼굴도… 지워질까 봐 무서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소리 내어 엉엉 우는 게 아니라,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눈물은 연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뜨거워 보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그리고 왜, 그 여자가 보낸 사람은 그를 ‘회장님’이라고 불렀을까. 다 망해서 거지가 되었다는 말이 거짓이었나?

나는 그의 방으로 들어가 그 낡은 가방을 노려보았다. 저 안에 답이 있다. 그가 목숨처럼 아끼는 저 가방 안에, 모든 진실이 들어 있을 것이다. 나는 결심했다. 오늘 밤, 그가 잠들면 저 가방을 열어보리라.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재앙이 닥칠지 희망이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확인해야 했다. 이 남자가 내게 가져온 것이 단순한 늙음인지, 아니면 더 거대한 비극인지.

[Word Count: 2450]

제1막 – 3부

밤 12시 30분. 세상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밖에서는 간간이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창문을 두드렸다. 나는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 벽시계 초침 소리만이 크게 들렸다. 똑, 딱, 똑, 딱. 마치 내 심장 박동 소리 같았다.

나는 도둑처럼 발소리를 죽여 작은 방으로 향했다. 문손잡이를 잡은 손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죄책감? 아니면 두려움? 남의 물건을, 그것도 전남편의 물건을 뒤진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지만, 낮에 찾아온 그 검은 양복 사내의 말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회장님.’ 그리고 그가 보였다는 ‘공포.’ 이 모든 의문을 풀 열쇠는 저 방 안에 있다.

끼익. 경첩에 기름칠을 해둔 덕분에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방 안에서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노인 특유의 냄새가 섞여 났다. 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새우잠. 어릴 때부터 불안하면 저렇게 자곤 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가 깨지 않기를 기도하며 방바닥을 살폈다.

가방은 책상 밑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검은색 덩어리처럼 보이는 그것. 나는 무릎을 꿇고 가방 앞으로 다가갔다. 지퍼에 채워진 작은 자물쇠가 달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열쇠가 필요하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베개 밑? 아니면 바지 주머니? 벗어 놓은 바지를 뒤적였지만 없었다. 그때, 그의 목에 걸린 끈이 보였다. 잠옷 깃 사이로 삐져나온 낡은 운동화 끈. 거기에 작은 열쇠가 매달려 있었다.

미치겠네. 잘 때도 열쇠를 목에 걸고 잔단 말인가. 얼마나 소중한 게 들었기에. 포기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호기심이 이성을 눌렀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의 목에서 열쇠를 빼내야 한다. 내 손가락이 그의 거친 목덜미에 닿았다. 차갑다. 사람의 체온이라기엔 너무 차가웠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운동화 끈의 매듭을 살살 풀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툭. 매듭이 풀렸다. 나는 열쇠를 손에 쥐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확인만 하면 된다. 나는 다시 책상 밑으로 기어가 가방의 자물쇠 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달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렸다. 나는 지퍼를 천천히 내렸다. 지익- 천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흠칫 놀라 그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코를 골고 있었다.

가방이 열렸다. 나는 휴대폰 액정 불빛을 비춰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낡은 내복 몇 벌과 수건이었다. 그 밑으로 각종 약봉지가 수북했다. 약국에서 파는 진통제, 소화제, 그리고 병원에서 처방받은 알 수 없는 알약들. 이름도 날짜도 적혀 있지 않은 약 봉투들이었다. 그리고 그 구석에, 낡은 양장 노트 한 권이 있었다.

이거다. 어젯밤 그가 그토록 열심히 적던 그 노트. 나는 노트를 꺼내 첫 장을 펼쳤다. 종이는 습기를 머금어 눅눅했다. 첫 페이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 김철수는 죄인이다.]

심장이 철렁했다. 나는 다음 장을 넘겼다.

[202X년 11월 5일. 오늘 점심은 국밥을 먹었다. 맛이 없었다. 옥자가 해준 뭇국이 생각났다. 이름을 잊지 말자. 박옥자. 박옥자. 박옥자…]

내 이름이 페이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치 주문을 외우듯, 혹은 벌을 서듯 빽빽하게 적힌 내 이름. 글씨체는 갈수록 흐트러지고 있었다.

[11월 20일. 머리가 아프다. 의사가 수술을 하라고 했다. 돈이 없다. 아니, 있어도 안 한다. 어차피 죽을 목숨.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 사람들에게 다 주었다. 이제 나는 빈 껍데기다.]

그 사람들? 내연녀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사업 파트너?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다 주었단 말인가.

[12월 1일. 집을 찾았다. 옥자가 사는 집. 멀리서 그녀를 보았다. 늙었다. 나 때문에 늙었다. 가면 안 된다. 하지만 가고 싶다.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밥 한 끼만 얻어먹고 싶다. 철수야, 기억해라. 너는 밥만 먹고 나오는 거다. 눌러앉으면 안 된다. 너는 자격이 없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의 진심이 글자 하나하나에 박혀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환영받지 못할 거라는 걸. 그런데도 배고픔보다 더 큰 그리움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붉은색 펜으로 커다랗게 날짜가 적혀 있었다. [12월 31일.] 그리고 그 밑에 짧은 문장 하나. [끝내는 날.]

무엇을 끝낸다는 것일까. 생명을? 아니면 고통을?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이 남자는 살기 위해 온 게 아니다. 죽을 자리를 찾아온 짐승이다. 나는 노트를 덮으려다 그 사이에 끼워져 있던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색이 바랜 흑백 사진. 젊은 시절의 나였다. 결혼식 날, 웨딩드레스를 입고 수줍게 웃고 있는 나. 그는 이 사진을 십오 년 동안 품고 다녔던 걸까. 그 젊은 여자와 살면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남자다.

그때였다. “으아아아악!”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가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노트를 떨어뜨렸다. 그가 침대 위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으며 악을 썼다. “오지 마! 저리 가! 때리지 마!”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여보! 정신 차려요! 꿈이야!”

그는 눈을 떴지만, 초점이 없었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았다. “잘못했어요… 회장님… 살려주세요…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요…” 회장님? 그는 자기가 회장이면서 누구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건가. “나야, 옥자야. 나를 봐요.” 내가 그의 뺨을 감싸자 그가 흠칫 떨며 나를 보았다. “옥… 자?” “그래요. 여기 우리 집이에요. 아무도 없어요.”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현실로 돌아오는 듯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서웠어… 검은 개들이… 나를 물어뜯었어…” “괜찮아요. 꿈이에요.”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 등을 토닥였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린내. 따뜻하고 축축한 기운이 이불 아래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그의 잠옷 바지가 젖어 있었다. 노란 얼룩이 이불까지 번지고 있었다. 그도 그것을 느꼈는지,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다 못해 흙빛으로 변했다. “아…” 그가 입을 막았다. 그의 눈에 절망이 서렸다.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천하의 김철수가, 자존심 하나로 버티던 남자가, 전처 앞에서 오줌을 쌌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죽고 싶어… 그냥 죽여줘… 제발…” 그의 울음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비참함과 수치심이 뒤섞인, 바닥까지 떨어진 인간의 비명.

나는 그 순간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지금이라도 짐을 싸서 내보낼 것인가. 아니면 이 무너진 폐허를 덮어줄 것인가. 나의 이성은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치매 노인의 수발을 드는 건 지옥이다. 그것도 나를 배신한 남자의 똥오줌을 받아내는 일이라니. 하지만 내 몸은 다르게 반응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롱에서 새 이불과 옷을 꺼냈다.

“일어나요. 씻게.” 내 목소리는 건조했다. 감정을 섞으면 무너질 것 같아서, 나는 기계처럼 행동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아냐… 내가 할게… 보지 마… 제발 보지 마…” “잔말 말고 일어나요! 감기 걸려!” 내가 소리치자 그는 움찔하며 멈췄다. 나는 그를 억지로 일으켜 욕실로 끌고 갔다. 그는 끌려가면서도 계속 고개를 숙이고 “미안해, 미안해”라는 말만 반복했다.

욕실에서 그를 씻기는 과정은 전쟁 같았다. 그는 수치심 때문에 몸을 가리려 애썼고, 나는 그런 그를 달래며 젖은 옷을 벗겼다. 그의 몸은 앙상했다. 갈비뼈가 드러난 가슴, 근육이 다 빠진 허벅지. 한때 나를 안아주던 그 단단한 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늙고 병든 노인의 육체뿐이었다. 샤워기를 틀어 따뜻한 물을 뿌리자 그가 몸을 떨었다. 나는 비누칠을 하며 그의 등을 문질렀다. 등에도 흉터가 있었다. 못 보던 흉터들이었다. 어디서 맞은 것 같은 멍 자국도 있었다. 도대체 십오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힌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젖은 이불을 치웠다. 그는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을 안고 있었다. 마치 벌을 받는 아이처럼. 나는 젖은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아왔다. “자요. 새벽에 일어나서 시장 가야 하니까.” 내가 불을 끄고 나가려 하자, 그가 다급하게 내 옷자락을 잡았다. “버리지 마…”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 버리지 마, 옥자야. 내가 잘못했어. 근데… 무서워. 혼자 있는 게 너무 무서워.”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 눈빛은 내가 알던 김철수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버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유기견의 눈빛이었다. 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의 손은 차갑고 거칠었지만, 그 절박함만은 뜨거웠다.

“안 버려요.” 나도 모르게 약속해 버렸다. “겨울 끝날 때까지는… 여기 있어요.” 그제야 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나는 방을 나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이 눈이 그치고 겨울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노트에서 본 ‘12월 31일’. 그리고 ‘끝내는 날’. 그날까지 보름 남았다. 그때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그가 왜 돌아왔는지, 그가 말한 ‘죗값’이 무엇인지, 그리고 ‘회장님’과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인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전처로서, 아니 한때 그를 사랑했던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도리일 것이다.

나는 다시는 편안하게 잠들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기억을 잃어가는 남자와, 그 기억을 붙잡아 진실을 캐내려는 여자의 전쟁. 그리고 그 전쟁터는 바로 이 낡은 집이었다.

[Word Count: 2580] [Hồi 1 kết thúc]

제2막 – 1부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내 집인데 내 집 같지가 않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오늘 반찬은 뭘 하나’가 아니라, ‘저 인간이 죽었나 살았나’ 하는 것이다. 방문을 열고 나가면 거실 한구석, 소파 위에서 웅크리고 자는 그의 등이 보인다. 그 굽은 등을 볼 때마다 나는 안도감과 짜증이 동시에 솟구친다. 살아 있구나. 오늘도 저 성가신 존재를 감당해야 하는구나.

그는 마치 투명 인간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부엌에 있으면 그는 마당으로 나갔고, 내가 거실에 있으면 그는 작은 방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사람의 기척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가끔 터져 나오는 마른기침 소리, 그리고 그 낡은 가방을 여닫는 지퍼 소리. 그 소리들이 내 신경을 갉아먹었다.

“밥 먹어요.” 내가 퉁명스럽게 부르면, 그는 기다렸다는 듯 튀어 나왔다. “어, 그래. 고마워.” 그는 밥상머리에서 늘 죄인처럼 굴었다. 반찬 투정은커녕, 김치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옛날에는 국이 조금만 식어도 상을 엎던 사람이었다. ‘국이 이게 뭐냐? 개밥이야?’ 그렇게 소리치던 그 위세는 어디 가고, 지금은 내가 먹다 남은 찌개 냄비에 밥을 말아 먹으면서도 연신 ‘맛있다, 맛있다’를 중얼거린다. 그 비굴함이 나는 더 보기 싫었다. 차라리 옛날처럼 화를 내거나 까탈을 부리면, 나도 마음껏 욕을 해줄 텐데. 순한 양이 되어버린 늑대를 미워하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가게 일은 제법 손에 익은 듯했다. 그는 내가 시키지 않아도 배추를 절이고, 무를 씻었다. 건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그런지, 요령은 없어도 힘쓰는 일은 척척 해냈다. 다만, 그의 손 떨림이 문제였다. 무거운 소금 가마니를 들 때는 괜찮은데, 가위질이나 칼질 같은 섬세한 작업을 할 때면 여지없이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며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오후가 되어 가게가 한산해지자, 나는 그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시장 가서 두부 좀 사 와요. 판두부로 두 판.” 그를 가게 안에만 두는 게 답답해서 내보낸 것이었다. 그는 “알았어, 금방 다녀올게” 하며 신나게 나갔다. 마치 엄마 심부름 가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저 사람이 정말 한때 수백 명의 직원을 거느리던 사장이었나.

삼십 분이 지났다. 시장은 걸어서 십 분 거리다. 올 때가 지났는데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났다.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길을 잃었나? 아니면 또 그 놈의 ‘검은 양복’들이 나타났나? 나는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밖으로 나갔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거리는 어수선했다. 시장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할아버지! 돈을 주셔야죠!” “맞다니까… 내가 줬어. 아까 줬잖아!” 익숙한 목소리. 나는 인파를 헤치고 들어갔다. 두부 가게 앞이었다. 그가 두부 두 판을 들고 멍하니 서 있고, 주인 여자가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이 양반이 치매인가? 돈도 안 내고 그냥 가려고 해? 당장 두부 내려놔요!” 사람들이 혀를 차며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벌게져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내가 지갑을… 분명히…” 그는 주머니를 뒤지고 또 뒤졌다. 하지만 나올 리가 없다. 내가 돈을 쥐여주지 않았으니까. 아차 싶었다. 내 정신 좀 봐. 심부름만 시키고 돈 주는 걸 깜빡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이 돈을 잃어버렸거나 이미 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내가 뛰어들어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제가 깜빡하고 돈을 안 줬네요. 미안해요, 두부 아줌마.” 두부 가게 주인이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옥자 사장님? 이 할아버지가 사장님네 일꾼이야?” “네… 뭐, 그렇게 됐어요.” 나는 급히 돈을 치르고 그를 끌고 나왔다. 그는 여전히 억울한 표정이었다. “옥자야, 내가 진짜 돈을 안 냈어? 내 지갑에 수표가 있었는데…” 수표라니. 그의 기억은 또 십오 년 전으로 점프해 있었다. 그 시절 그는 지갑에 늘 백만 원짜리 수표를 두둑이 넣고 다녔으니까.

“당신 지갑에 십 원 한 장 없어요. 정신 좀 차려요, 제발.” 내가 쏘아붙이자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현실을 자각한 듯, 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아… 그랬지. 나 거지였지.” 그 자조적인 한마디가 눈발 속에 흩어졌다. 나는 두부 판을 뺏어 들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거라도 들고 있어야 그가 덜 비참할 것 같았다. 우리는 말없이 눈길을 걸었다. 그가 앞서 걷고, 내가 뒤따라 걸었다. 그의 구멍 난 양말이 낡은 운동화 사이로 보였다. 시장에서 산 이천 원짜리 양말이라도 하나 사서 신길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가게로 돌아와 두부를 정리하는데, 그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기… 옥자야.” “왜요.” “그… 보일러실 말이야. 문이 삐걱거리던데. 내가 고쳐줄까?” 그는 뭐라도 해서 밥값을 하고 싶어 했다.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은 눈치였다. “됐어요. 사람 부르면 돼요.” “아냐, 나 건설 회사 사장이었어. 문짝 하나 고치는 건 일도 아냐. 공구함 어디 있어?” 그의 눈빛이 모처럼 반짝였다. 자신이 유일하게 잘하는 일.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 나는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창고를 가리켰다. “저기 구석에 있어요. 다치지나 말아요.”

그는 신이 나서 공구함을 들고 보일러실로 갔다. 뚝딱, 뚝딱. 망치질 소리와 드라이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게 일을 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제법 경쾌한 소리였다. 옛날 생각이 났다. 신혼 때, 우리가 살던 셋방은 툭하면 고장이 났다. 그때마다 그는 웃통을 벗어 던지고 뚝딱뚝딱 고쳐내곤 했다. ‘걱정 마, 오빠가 다 알아서 해.’ 그 듬직했던 모습. 땀 흘리는 등짝이 참 믿음직스러웠는데.

“악!” 짧은 비명 소리가 회상을 깨뜨렸다. 나는 놀라서 보일러실로 달려갔다. 그가 손가락을 부여잡고 웅크리고 있었다. 바닥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왜 그래요? 다쳤어요?” 내가 손을 낚아채자, 그가 황급히 감췄다. “아냐… 별거 아냐. 살짝 긁혔어.” 하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다. 망치질을 하다가 손가락을 찧은 모양이었다. 손톱이 보라색으로 멍들어 있었고, 살이 터져 피가 솟구쳤다. “이게 별거 아니에요? 이리 와요!”

나는 그를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와 구급상자를 꺼냈다. 소독약을 바르자 그가 ‘윽’ 하고 신음을 삼켰다. “그러게 내가 하지 말랬잖아요. 왜 사서 고생을 해요, 왜!” 나는 화를 내며 붕대를 감았다. 화를 내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목소리였다. 그는 내 타박을 들으면서도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늙었다, 우리 옥자.” 그가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흰 머리도 많고… 눈가에 주름도 자글자글하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그런 말 할 자격이나 있어요?” “없지. 없지, 암.” 그는 쓸쓸하게 웃었다. “근데 여전히 손은 따뜻하네. 약손이야, 약손.”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거칠었다. 굳은살이 박이고, 뼈마디가 굵어진 손. 한때는 부드러운 로션 냄새가 나던 손이었는데, 지금은 흙냄새와 쇠 냄새가 났다. 나는 붕대 매듭을 꽉 조였다. “아!” “아프라고 묶은 거예요. 정신 차리라고.” 나는 매몰차게 손을 뿌리쳤지만,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위험하다. 이 측은지심이 위험하다. 미움만 남아야 하는데, 자꾸만 옛날의 정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밖에서 누가 대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택배입니다.” 택배 올 게 없는데. 문을 열어보니 문 앞에 작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보낸 사람은 ‘강태식’. 누구지? 처음 듣는 이름이다. 상자를 들고 들어와 그에게 물었다. “강태식이라는 사람 알아요?” 텔레비전을 보던 그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뭐? 강… 강 변호사?”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변호사요? 당신한테 택배를 보냈는데.” 그는 낚아채듯 상자를 받아 들었다.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는 상자를 뜯지도 않고 가슴에 품고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잠깐만요. 뭐예요? 뭔데 그렇게 숨겨요?” “아무것도 아냐. 내 거야. 내 물건이야.” 그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수상하다. 낮에 온 양복 입은 남자들, 그리고 밤에 온 변호사의 택배. 그가 말한 ‘다 잃었다’는 말과 ‘회장님’이라는 호칭.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퍼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조각이 몇 개 부족했다. 나는 방문에 귀를 대고 엿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억눌린 울음소리. 그는 또 울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꿈을 꾸었다. 젊은 시절의 그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말끔한 양복 차림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얼굴이 점점 허물어졌다. 눈이 녹아내리고, 입이 찢어지고, 마침내 해골처럼 변해버렸다. ‘옥자야… 나 좀 살려줘…’ 그가 뼈만 남은 손을 뻗어 내 목을 졸랐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허억… 허억…” 식은땀이 흥건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목이 타 들어갔다.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갔다. 거실은 캄캄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돌아서는데, 식탁 위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하얀 봉투. 그리고 그 옆에 작은 약병 하나.

나는 불을 켰다. 봉투 겉면에는 ‘옥자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그의 글씨였다. 어젯밤 온 택배 안에 들어있던 걸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현금이었다. 오만 원짜리 지폐 스무 장. 백만 원이었다. 그리고 짧은 편지.

[옥자야. 이건 생활비야. 변호사한테 부탁해서 남은 거 긁어모았어. 이게 내 전 재산이야. 염치없지만, 이걸로 내 밥값 하고 싶어. 그리고… 저 약은 나중에 내가 너무 아파서 정신을 놓으면… 그때 먹여줘. 부탁할게.]

나는 약병을 집어 들었다. 수면제였다. 치사량에 가까운 양이 들어 있었다. 이 인간이 정말… 그는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내 손을 빌려서 죽으려고. 이기적이다. 끝까지 이기적이다. 자기 편하자고 나에게 살인자가 되라고? 아니면 자살 방조자가 되라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방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는 자고 있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은 깊은 우물처럼 고요했다. “봤어?” 그가 담담하게 물었다. “이게 뭐예요? 나보고 당신을 죽여 달라는 거예요?” 나는 약병을 그에게 집어 던졌다. 약병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한테 이런 부탁을 해요? 내가 당신한테 그렇게 만만해요?” 눈물이 터져 나왔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 폭발했다. “당신은 나한테 평생 상처만 줬어. 근데 갈 때도 상처를 주고 가겠다고? 내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길 바라는 거예요?”

그는 말없이 내 절규를 들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또 무릎이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지겨워요! 그럴 거면 나가요! 나가서 객사를 하든 얼어 죽든 알아서 하란 말이에요!” 나는 그를 밀쳤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내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무서워서 그래… 옥자야, 나 너무 무서워.”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 “기억을 잃는 게 무서운 게 아냐. 내가… 내가 짐승이 되어서 너를 해칠까 봐… 그게 무서워.” “……뭐라고요?” “의사가 그랬어. 전두엽이 망가져서… 폭력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고. 내가 너를 못 알아보고… 너를 때리거나 욕하면 어떡해… 나는 그 꼴을 보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그의 고백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망가지는 것보다, 나를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남자. 이 남자가 정말 나를 배신하고 떠난 그 나쁜 놈이 맞나. 15년 전의 그는 나의 아픔 따위엔 관심도 없었는데. 지금의 그는 오로지 나를 위해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가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를 마주 보았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지도, 위로하지도 못하고 그저 짐승처럼 헐떡이며 울었다. 새벽의 푸른 빛이 창문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빛이 우리 두 사람의 초라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약속해요.” 내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당신이 짐승이 되면… 그때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병원에 가두든, 요양원에 보내든.” “……” “그러니까 죽는 건 안 돼요. 내 집에서 송장 치우기 싫으니까.” 거짓말이었다. 그를 살리고 싶었다. 이대로 보내기엔, 아직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리고 아직… 그를 미워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 말 들을게.” 그는 바닥에 떨어진 약병을 주워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 내가 못 찾게.”

나는 약병을 주머니에 넣었다. 무거운 돌덩이가 들어온 것 같았다. 이것은 그의 생명이다. 이제 그의 생명은 내 주머니 속에 있다. 나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날이 밝았다. 보일러실 문은 여전히 삐걱거렸고, 그가 고치려다 만 흔적이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고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서툰 솜씨로, 피를 흘려가며 나를 위해 하려 했던 그 마음의 흔적을, 조금은 더 남겨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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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막 – 2부

동지(冬至)였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날. 어둠이 길다는 것은 그만큼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뜻이고, 그것은 나 같은 노인에게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새벽부터 팥을 삶았다. 붉은 팥물이 끓어오르며 구수한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 액운을 쫓고 귀신을 물리친다는 팥죽. 이 붉은 죽이 내 집에 깃든 불행과, 저 남자의 머릿속을 갉아먹는 병마도 쫓아낼 수 있을까.

“무슨 냄새야? 달콤한 냄새가 나네.” 그가 부스스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동지 팥죽이에요. 세수하고 와요.” 식탁에 마주 앉았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 그릇을 앞에 두고, 그는 아이처럼 입맛을 다셨다. “새알심이다. 나 이거 좋아하는데.” 그가 숟가락으로 하얀 찹쌀 경단을 건져 올렸다. “기억나요? 우리 첫 데이트 때 팥죽 먹었던 거.” 그가 불쑥 말했다. 나는 숟가락질을 멈췄다. 기억한다. 가난했던 시절, 돈이 없어서 비싼 레스토랑 대신 시장통 팥죽집에 데려갔던 그였다. 그는 미안해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나는 그 뜨끈하고 달콤한 맛이 좋아서 웃었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팥죽 말고 스테이크 사줄게.’ 그때의 약속. 그는 그 약속을 지켰었다. 돈을 벌고 나서는 정말 지겹도록 비싼 것만 먹으러 다녔으니까. 하지만 정작 가장 행복했던 건 그 시장통 팥죽 한 그릇을 나눠 먹던 때였다는 걸, 우리는 너무 늦게 알았다.

“그걸 아직도 기억해요?” “그럼. 옥자 네가 입술에 팥물 묻히고 웃던 거, 얼마나 예뻤는데.” 그가 히죽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의 눈빛이 맑았다. 치매라는 병은 참 얄궂다. 어제 먹은 점심 메뉴는 잊어버리게 하면서, 사십 년 전의 사소한 추억은 생생하게 끄집어낸다. 마치 현재를 지우고 과거 속에 살라고 강요하는 형벌 같다.

“식기 전에 먹어요.” 나는 짐짓 무뚝뚝하게 말하며 동치미 국물을 들이켰다. 목이 메었다. 그가 기억하는 ‘예쁜 옥자’는 이제 없다. 그의 앞에는 늙고 지친, 독기만 남은 할머니가 앉아 있을 뿐이다.

오후가 되자 눈발이 거세졌다. 나는 가게 문을 일찍 닫기로 했다. 날씨 탓인지 손님도 없고, 그의 상태도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 이후부터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창밖을 내다보며 손톱을 물어뜯고, 거실을 뱅뱅 돌았다. “왜 그래요? 화장실 가고 싶어요?” “아니… 아니…” 그는 초조한 눈빛으로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시간이 다 됐는데.” “무슨 시간요?” “민우… 민우 데리러 갈 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민우. 우리 아들. 결혼 3년 만에 얻었지만, 홍역으로 다섯 살에 저세상으로 보낸 우리 아들. 삼십 년이 지났다. 내 가슴에 묻은 이름. 그가 그 이름을 꺼냈다.

“여보, 민우는… 없잖아요.”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유치원 끝날 시간이야. 눈이 이렇게 오는데 애가 밖에서 떨고 있을 거라고!”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은 공포와 집착으로 번들거렸다. 현실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우산… 우산 어디 있어!” 그는 신발장으로 달려가 우산을 찾았다. “정신 차려요! 민우 죽었잖아요! 삼십 년 전에 죽었잖아요!” 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잔인하지만 사실을 말해줘야 했다. 안 그러면 그가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거칠게 뿌리쳤다. 힘이 장사였다. 나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여자가 미쳤나! 우리 민우가 왜 죽어! 비켜! 내 새끼 데리러 가야 해!” 그는 맨발에 슬리퍼만 신은 채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여보! 철수 씨!”

나는 황급히 외투를 걸치고 뒤를 쫓았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거리.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맹렬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미끄러운 눈길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민우야! 아빠가 간다! 민우야!” 그의 절규가 바람 소리에 섞여 흩어졌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저 남자는 십오 년 전, 나를 버리고 떠날 때 아들의 제사조차 챙기지 않았던 사람이다. ‘죽은 자식 붙잡고 있어 봤자 뭐해.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렇게 매몰차게 말했던 그가. 지금 뇌가 망가지고 이성이 사라진 상태에서, 가장 먼저 찾는 게 죽은 아들이라니. 이 무슨 비극인가.

그는 동네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멈춰 섰다. 학교는 이미 방학이라 텅 비어 있었다.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철문을 잡고 흔들었다. 쾅, 쾅, 쾅. “문 열어! 내 아들 안에 있어! 문 열란 말이야!” 경비실에서 경비원이 뛰쳐나왔다. “아니, 할아버지! 왜 이러세요!” “내 아들 내놔! 너희가 감금했지? 민우야!” 그는 경비원의 멱살을 잡았다. 경비원은 당황해서 그를 밀쳐냈다. 그가 눈길 위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덤벼들려 했다.

내가 뛰어들어가 그를 뒤에서 껴안았다. “여보, 그만해! 제발 그만해!” “놔! 민우가 저기 있어! 저기서 울고 있단 말이야!” 그는 허공을 가리키며 울부짖었다. 텅 빈 운동장. 아무도 없는 그곳을 가리키며 그는 오열했다. “아빠가 늦어서 미안해… 춥지? 아빠가 잘못했어…” 그의 환각 속에는 다섯 살짜리 꼬마가 서 있는 모양이었다. 추위에 떨며 아빠를 기다리는 작은 아이. 그것은 아마도 그가 평생 짊어지고 있던 죄책감의 형상일 것이다. 사업하느라 바빠서, 돈 버느라 바빠서, 아픈 아이 곁을 지키지 못했던 젊은 날의 과오. 그것이 치매라는 틈을 타고 터져 나온 것이다.

“할머니, 경찰 부를까요? 이분 좀 이상하신데.” 경비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닦았다.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제 남편이에요. 아파서 그래요… 치매예요.” 치매. 남에게 처음으로 내뱉은 그 단어가 입안에서 썼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그를 일으켰다. 그는 이제 힘이 다 빠진 듯 축 늘어져 있었다. “민우가… 없어.”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집에 갔대요. 내가 먼저 데려다 놨어.” 나는 그를 달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정말?” “그럼요. 따뜻한 방에서 아빠 기다리고 있어요. 가요, 우리도.” 그는 그제야 고분고분해졌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우리는 서로를 부축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내 장갑을 벗어 그에게 끼워주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내 손을 보더니, 갑자기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고마워요… 선생님.” 선생님? 그는 이제 나를 유치원 선생님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우리 민우 잘 부탁합니다. 제가… 제가 못난 아비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눈보라를 뚫고 걸을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그를 씻기고 이불 속에 눕혔다. 그는 열이 펄펄 끓었다. 찬 바람을 너무 많이 쐰 탓이다. 해열제를 먹이고 물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는 끙끙 앓으면서도 헛소리를 계속했다. “회장님…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옥자야… 도망가… 놈들이 와…” “싸인하지 마… 그 서류 가짜야…”

나는 그의 입가에 귀를 기울였다. 단편적인 조각들. 하지만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협박, 도망, 가짜 서류, 그리고 옥자를 지키라는 외침. 그는 십오 년 전, 단순히 바람이 나서 떠난 게 아니었다. 무언가에 쫓겨서, 나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나를 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젊은 내연녀’는? 미란이라고 했던가.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때, 그의 외투 주머니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에게 휴대폰이 있었나? 그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아서 없는 줄 알았다. 나는 외투를 뒤져 낡은 폴더폰 하나를 찾아냈다. 액정에는 ‘발신번호 표시제한’이라는 글자가 뜨고 있었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곧바로 문자가 왔다.

[김철수 씨, 숨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물건 내놓으세요. 당신 딸이 보고 싶지 않습니까?]

딸? 내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우리에겐 딸이 없다. 아들 민우가 죽은 뒤로 자식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내연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인가? 배신감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나를 지키려고 떠났다더니, 가서 애까지 낳고 살았단 말인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동정심이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었다. 나는 자고 있는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일어나서 해명해. 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그는 고열에 시달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으으… 아파…” 나는 입술을 깨물며 휴대폰을 덮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가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때 물어야 한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딸’이라는 단어로 가득 찼다. 그 아이가 인질로 잡혀 있는 건가? 그래서 그가 그토록 공포에 떨었던 건가? 그렇다면 ‘물건’은 뭐지? 가방 속에 있는 그 노트?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무엇?

밤이 깊었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거실 불을 끄고 소파에 앉아, 어둠 속에서 그의 방문을 노려보았다. 그때, 대문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엔진 소리가 꺼지고, 문이 열리는 소리. 나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검은색 세단이었다. 며칠 전 가게에 왔던 그 차. 차 안에는 두 명의 남자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내리지 않고 차 안에서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었다. 담배 불빛이 깜빡였다.

공포가 현실로 다가왔다. 단순한 빚쟁이가 아니다. 저들은 전문가들이다. 조직폭력배, 아니면 기업형 해결사들. 그가 말한 ‘검은 개들’이 바로 저들이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식칼을 확인했다. 그리고 현관문의 이중 잠금장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두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오기가 생겼다. 내 집이다. 내 구역이다. 감히 누가 내 허락 없이 내 집에 들어와 내 사람을 해치려 하는가. ‘내 사람’.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그렇게 불렀다.

새벽녘, 그의 열이 조금 내렸다. 그는 눈을 뜨고 물을 찾았다. 내가 물을 떠다 주자 그가 벌컥벌컥 마셨다. “좀 살 것 같아요?” “…응. 미안해, 밤새 고생시켰네.” 그의 눈빛이 돌아와 있었다. 맑고 깊은, 하지만 슬픈 눈빛.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딸이 있어요?” 그가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쿨럭, 쿨럭. 그는 기침을 하며 얼굴이 빨개졌다. “무… 무슨 소리야?” “문자 봤어요. 딸이 보고 싶지 않냐고 협박하는 문자.” 나는 휴대폰을 그의 앞에 던졌다. “설명해요. 그 여자랑 낳은 딸이에요?”

그는 고개를 숙였다.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긍정 같아서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 맞아. 딸이 있어.” “…몇 살이에요?” “열네 살.” 십오 년 전에 떠났으니, 나가자마자 낳은 아이였다. 기가 막혔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잘됐네요. 딸도 있는데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어요? 딸한테 가지.” “…내 딸 아니야.” “뭐라고요?” “입양한 아이야. 미란이… 그 여자가 데려온 아이.” “거짓말하지 마요. 입양한 아이 때문에 이렇게 쫓겨 다닌다고요?”

그는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아이가… 증거를 가지고 있어.” “무슨 증거요?” “내가 누명을 쓴… 그리고 회장이 저지른 비자금 장부. 그 아이 가방 속에 있어. 그 아이는 몰라. 그게 뭔지.” “그래서? 그 아이를 구하려고 여기 온 거예요?” “아니. 그 아이를 구하려면… 내가 죽어야 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내가 죽어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사라져야… 그들이 아이를 놔줄 거야. 그리고 너도.”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복잡한 음모론 같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다. “옥자야. 12월 31일. 그날이 공소시효 만료일이야.” “공소시효?” “응. 내가 횡령했다는 누명. 그날까지만 내가 살아있으면, 아니 숨어 있으면… 사건은 종결돼. 하지만 놈들은 그 전에 나를 찾아서 죽이거나, 자백을 받아내려고 할 거야.” “그럼 경찰에 신고해요!” “안 돼. 경찰 윗선도 다 그놈들 한통속이야. 신고하면 바로 잡혀가. 그러면 나만 죽는 게 아니라 너도 위험해져.”

그는 내 손을 잡았다. “보름만… 딱 보름만 버티면 돼. 그 뒤에는 내가 알아서 할게. 자수하러 가든, 죽든.” “죽는다는 소리 좀 그만해요!” 나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속으로는 상황 파악이 되고 있었다. 그는 지금 거대한 싸움을 혼자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나를, 그리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그 딸이라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있다.

“그럼 그 딸은 어디 있는데요?” “모르겠어… 놈들이 데리고 있는지, 도망쳤는지… 연락이 안 돼.” 그때였다. 밖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 담을 넘는 소리.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웅크렸다. “왔어… 그들이 왔어…” 그의 눈동자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포가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방에 있어요. 나오지 마요.” “안 돼! 옥자야, 나가지 마!” 그가 내 옷자락을 잡았지만 나는 뿌리쳤다. 나는 거실로 나가 야구방망이를 들었다. 현관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눈을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누군가가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철컥, 철컥. 잠겨 있어서 열리지 않았다. 그러자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아주 정중하고, 그래서 더 소름 끼치는 노크 소리.

“김철수 씨, 계신 거 다 압니다. 문 여시죠.” 낮고 굵은 목소리. 나는 숨을 죽이고 문 뒤에 섰다. “누구세요! 경찰 부를 거예요!” 내가 소리치자 밖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모님, 저희 나쁜 사람 아닙니다. 회장님 모시러 왔습니다. 병원으로 가셔야죠.” “필요 없으니까 돌아가요!” “이거 곤란하네. 회장님 상태가 안 좋으셔서 강제로라도 모셔야 하는데.” 문이 쾅, 하고 울렸다. 발로 찬 것이다. 나는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이 낡은 문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때, 안방 문이 열리고 그가 나왔다. 손에 식칼을 들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의 겁먹은 노인이 아니었다. 살기(殺氣). 벼랑 끝에 몰린 짐승의 살기가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옥자야, 뒤로 물러나.”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여보… 칼 내려놔요.” “문 열어.” “뭐라고요?” “열라고. 내가 해결해.” 그는 결연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잠금장치를 풀었다. 도어록을 열자 문이 벌컥 열렸다. 찬 바람과 함께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두 명이 들어왔다.

“오, 회장님. 칼은 좀 위험한데요.”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칼을 든 채 그들에게 다가갔다. “내 집에서 나가. 당장.” “저희랑 가시죠. 사모님이 기다리십니다.” 남자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그가 칼을 휘둘렀다. 휙! 남자가 놀라 뒤로 물러났다. 양복 소매가 찢어졌다. “다음엔 목이야.” 그가 으르렁거렸다. 그의 기세에 남자들이 주춤했다. 치매 노인인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저항이었다.

“좋습니다. 오늘은 물러가죠. 하지만 곧 다시 올 겁니다. 그때는 이렇게 신사적으로 안 합니다.” 남자들이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그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쨍그랑. 식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여보!” 나는 그를 안아 일으켰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을 비 오듯 흘렸다. 그리고 나를 보며 웃었다. “봤지? 나… 아직 쓸만하지?” 그 웃음이 너무나 처연해서 눈물이 났다. “그래요… 쓸만해요. 아주 대단했어요.”

그를 다시 눕히고 나오는데, 거실 바닥에 떨어진 그의 지갑이 보였다. 아까 몸싸움을 하다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지갑이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사진 한 장이 삐져나와 있었다. 나는 사진을 주워 들었다. 열네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의 사진.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젊은 여자. 미란이다. 그런데… 여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아주 많이.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디서 봤더라? 30년 전? 아니, 더 오래전?

사진을 뒤집어 보았다. 뒷면에 날려 쓴 글씨가 있었다. [고아원 후원 방문 기념. 미란이와 함께.] 날짜는 20년 전이었다. 그가 외도하기 훨씬 전이다. 그렇다면… 미란이는 내연녀가 아니라 그가 후원하던 고아원 아이였나? 그럼 그 딸은?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키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던 ‘불륜’이라는 시나리오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그는 십오 년 전, 바람이 난 게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 거대한 덫에 걸렸고, 그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한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나였다.

나는 그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누워 있는 저 남자. 평생 나를 속이고, 나를 위해 인생을 통째로 내던진 바보 같은 남자.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더 이상 미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무치는 그리움, 그리고 뒤늦은 후회였다.

“기다려요.” 나는 사진을 가슴에 품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내가 지킬게. 당신도, 그 비밀도.”

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춥지 않았다. 내 안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전쟁이다. 저 늙고 병든 남자를 데려가려는 저승사자와, 그리고 그를 괴롭히는 산 사람들과의 전쟁. 나는 기꺼이 그 전쟁의 선봉장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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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막 – 3부

폭풍전야처럼 고요한 아침이었다. 어젯밤의 소동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세상은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부엌에서 북엇국을 끓였다. 술도 안 마신 그에게 해장국이라니 우습지만, 왠지 속을 풀어주고 싶었다. 보글보글 끓는 국물 소리가 위로가 되었다.

방문을 열자, 그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젯밤의 그 살기 등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힘없고 쪼그라든 노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일어났어요? 밥 먹게 나와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는 눈빛이 깊고 슬펐다. 마치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사람처럼. “옥자야.” “왜요.” “오늘… 날씨가 참 좋다.” “눈이 이렇게 오는데 뭐가 좋아요. 춥기만 하지.”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이불을 정리했다. 그는 내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아침부터 또 무슨 청승이에요. 밥이나 먹어요.”

아침 식사는 조용했다. 그는 국을 한 숟가락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시원하다. 옥자 네가 끓인 국이 제일 맛있어.” “입에 발린 소리.” 나는 피식 웃었지만,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는데, 그가 뒤에서 불쑥 말했다. “나, 목욕탕 좀 다녀올게.” “목욕탕요? 혼자서?” “응. 떼 좀 밀고 싶어서. 남자들끼리 등도 밀어주고 그래야 개운하지.” “갈 수 있겠어요? 길도 미끄러운데.” “걱정 마. 바로 앞 사거리잖아. 그 정도는 기억해.” 그는 짐짓 씩씩한 척하며 옷을 챙겨 입었다. 나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주머니에 찔러주었다. “끝나고 바나나우유라도 사 먹고 와요. 미끄러지니까 조심하고.” “고마워. 다녀올게.”

그는 현관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쿵, 하고 울렸다. 나는 설거지를 마저 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그릇이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목욕탕 간다는데 뭘.’ 애써 불안을 떨쳐내려 라디오를 켰다. 하지만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가 하필이면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었다. 재수 없게.

한 시간이 지났다. 두 시간이 지났다. 점심때가 다 되어가는데 그가 오지 않았다. 불안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는 앞치마를 던져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거리 목욕탕. 카운터에 있는 주인에게 물었다. “저기요, 혹시 키 크고 마른 할아버지 안 왔어요? 눈이 좀 나쁜…”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늘 아침엔 노인분들 한 명도 안 왔어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목욕탕에 간 것이 아니었다. 도망쳤다. 나를 지키기 위해, 그 ‘검은 개들’을 유인하기 위해 내 곁을 떠난 것이다.

나는 집으로 달려와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불은 각을 맞춰 개켜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그리고… 늘 그가 보물처럼 끌어안고 있던 그 낡은 가방. 그 가방이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가 가방을 두고 갔다. 자신의 목숨이라던 가방을.

가방 옆에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집어 들었다. 흘겨 쓴 글씨가 눈물 자국에 번져 있었다.

[옥자야.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나는 멀리 떠났을 거야. 어젯밤 놈들을 보고 깨달았어. 내가 있으면 네가 위험해진다는 걸. 나는 이미 끝난 목숨이야. 하지만 너는 살아야지. 평생 고생만 시켰는데, 늙어서까지 짐이 될 수는 없어. 가방 안에 있는 것들… 그게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죄야. 부디 건강해라. 내 사랑, 옥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 바보 같은 인간. 어디로 가려고. 그 몸으로 어디를 가서 죽으려고. 나는 미친 듯이 가방을 열었다. 지퍼를 열자,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옷가지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통장. 그리고 두툼한 서류 봉투.

나는 통장 하나를 펼쳤다. 예금주: 박옥자. 매달 25일, 정확하게 입금된 돈. 백만 원, 이백만 원, 때로는 오십만 원. 금액은 달랐지만, 십오 년 동안 단 한 달도 빠짐없이 입금되어 있었다. 적요란에는 ‘생활비’, ‘생일 축하’, ‘결혼기념일’ 같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마지막 통장의 잔액은 3억이 넘었다. 그는 빈털터리가 아니었다. 그는 십오 년 동안 벌어들인 모든 돈을 내 이름으로 된 차명 계좌에 모으고 있었다. 자신은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구멍 난 양말을 신으면서, 나를 위해 이 돈을 모은 것이다.

“이게 다 뭐야… 이 미친 인간아…” 나는 오열하며 서류 봉투를 뜯었다. 대학병원 진단서였다. 환자명: 김철수. 진단명: 교모세포종 (뇌종양 4기), 알츠하이머성 치매. 소견: 수술 불가. 기대 여명 3개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치매뿐만이 아니었다. 뇌종양. 그것도 말기.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기억을 잃어가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끝내는 날’이라고 적었던 거구나. 그래서 밥 한 끼만 달라고 했던 거구나. 살려고 온 게 아니라,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봉투 안에서 또 다른 서류가 나왔다. 이혼 합의서 사본. 그리고 그 뒤에 붙은 각서 한 장. [각서. 본인 김철수는 상기 채무 50억 원을 전액 인수하며, 처 박옥자에게는 어떠한 채무도 전가하지 않을 것을 각서합니다. 대신 이혼을 조건으로 한다.] 날짜는 15년 전, 우리 이혼하기 딱 일주일 전이었다.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그때 그는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앉은 게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의 빚을, 아마도 그 ‘회장’이라는 작자의 빚을 대신 뒤집어쓴 것이다. 그리고 채권자들이 나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위장 이혼을 감행한 것이다. 바람? 젊은 여자? 다 쇼였어. 나를 정 떨어지게 만들어서, 내가 미련 없이 그를 버리게 만들려고 꾸민 연극이었다.

“으아아아아!” 나는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바보 천치 같은 놈. 등신 같은 놈. 왜 말을 안 해. 왜 혼자 짊어져. 우리가 부부였잖아. 힘들면 같이 죽자고 약속했잖아. 나는 그를 15년 동안이나 저주하고 미워했다. 그가 다른 여자와 뒹굴며 희희낙락할 거라 생각하며, 밤마다 그의 불행을 빌었다. 그런데 그는 그 시간 동안, 지옥 같은 공사판을 전전하며 내 노후 자금을 모으고 있었다. 자신은 암세포가 뇌를 파먹어 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오직 나에게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울고 있을 시간이 없다. 찾아야 한다. 이대로 그를 보내면 나는 평생 나를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외투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하얗고 차가웠다. “김철수! 어디 갔어! 나와!” 나는 골목길을 헤매며 소리쳤다. 미친 여자처럼 머리를 산발하고, 눈길을 뛰어다녔다. 어디로 갔을까. 터미널? 기차역? 아니다. 그는 멀리 가지 못한다. 기억이 온전치 않으니까. 그가 기억하는 장소. 그가 본능적으로 찾아갈 만한 장소.

퍼뜩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버스로 세 정거장 떨어진 낡은 공원.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 그리고 그가 십오 년 전, 짐을 싸 들고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던 그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

나는 달렸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신발이 벗겨질 뻔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상관없었다. 제발 있어라. 제발 살아만 있어라.

공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눈발 사이로 희미한 형체가 보였다. 낡은 벤치. 눈이 수북이 쌓인 벤치 구석에, 누군가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검은색 코트. 헝클어진 백발. 김철수다.

“여보!” 내가 소리치며 달려갔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미 저체온증이 온 것일까.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김철수! 눈 좀 떠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파랗게 얼어 있었다. 속눈썹에 눈송이가 맺혀 있었다. 그가 힘겹게 눈을 떴다. 초점이 흐렸다. “…옥자야?” 그의 목소리는 모기 소리만큼 작았다. “환영인가… 우리 옥자가 왔네…” “환영 아냐! 나야! 당신 마누라 박옥자야!” 나는 그를 끌어안았다. 얼음덩어리 같았다. 나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 안간힘을 썼다.

“가…” 그가 나를 밀어내려 했다. 힘이 하나도 없는 손짓이었다. “가야 해… 놈들이 와… 너 다쳐…” “다치라고 해! 같이 죽어 그냥!” 나는 악을 썼다. “왜 거짓말했어! 왜! 뇌종양이라며! 다 알고 왔어! 통장도 봤고 각서도 봤어!” 내 말에 그의 눈이 커졌다. “…봤어?” “그래, 다 봤어! 이 나쁜 놈아, 그걸 십오 년이나 숨겨? 네가 사람이야?” 나는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펑펑 때렸다. 때리면서도 내가 더 아팠다.

그는 멍하니 나를 보더니,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들켰네… 끝까지 멋있는 척하고 싶었는데…” “멋있기는 개뿔! 거지꼴로 와서 뭐가 멋있어!” 나는 울면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집에 가자. 가서 따뜻한 밥 먹자.” “안 돼… 나 가면 안 돼. 옥자야, 나 무서워. 내가… 내가 너를 잊어버릴까 봐.” 그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어린아이 같은 울음이었다. “머리가 아파… 자꾸 깜빡깜빡해… 네 얼굴이 흐려져…” “괜찮아. 내가 기억해. 내가 다 기억할게.” “그리고… 미란이…”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만큼 세게. “미란이 딸… 은지… 그 아이 찾아줘. 그 아이가 위험해. 그 아이 가방에… 놈들이 찾는 장부가 있어.”

그는 마지막 정신을 쥐어짜 내고 있었다. “은지? 그 입양한 딸?” “응… 고아원에 숨겨놨는데… 놈들이 알았어. 옥자야, 제발… 그 아이는 죄가 없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말려들었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일어나.” “아니, 나는 못 가. 다리가… 다리가 안 움직여.” 그는 정말로 움직이지 못했다. 추위 때문인지, 병세가 악화된 건지 하반신이 마비된 듯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검은색 세단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보라를 뚫고 우리를 비췄다. 놈들이다. 집에 없으니 이곳까지 쫓아온 것이다. “옥자야, 도망가!” 그가 비명을 질렀다. “날 두고 가! 어서!” “못 가! 죽어도 같이 죽어!” 나는 그를 부축해 일으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차 문이 열리고 건장한 사내 셋이 내렸다. 그들은 손에 쇠파이프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나는 벤치 옆에 있던 눈 치우는 삽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지만, 마음은 차분해졌다. 이상하지. 그토록 평온한 노후를 원했는데, 지금 나는 눈보라 치는 공원에서 쇠파이프를 든 깡패들과 대치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이 지난 15년 중 가장 살아있는 기분이다. 내 뒤에 내 남편이 있다. 내가 지켜야 할, 멍청하고 불쌍한 내 남자가 있다.

“오지 마! 한 발자국만 더 오면 다 죽여버릴 거야!” 내가 삽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사내들이 비웃으며 다가왔다. “할망구, 힘 빼지 말고 비켜. 우린 영감탱이만 데려가면 돼.” “데려가려면 내 시체를 넘고 가라.”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 벤치에 쓰러져 있던 그가 비틀비틀 일어났다. 완전히 마비된 줄 알았던 그가, 초인적인 힘으로 일어선 것이다. 그는 나를 자신의 등 뒤로 밀쳤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라이터. 그리고 품 안에서 꺼낸 작은 기름병. 가게에서 쓰는 라이터 기름이었다. 언제 챙겨 나왔을까.

“가까이 오지 마.” 그가 기름을 자신의 몸에 뿌렸다. 역한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한 발자국만 더 오면, 여기서 다 같이 타 죽는 거야.” 그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것은 치매 노인의 눈이 아니었다. 평생을 거친 공사판에서 살아남은, 야수 같은 사내의 눈이었다. “회장한테 전해. 장부는 내가 가지고 지옥으로 간다고.” 그는 라이터를 켰다. 치이익. 불꽃이 일렁였다. 사내들이 기겁하며 멈춰 섰다. 미친놈은 건드리는 게 아니라는 걸 그들도 아는 것이다.

“여보… 안 돼…” 내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직하게 말했다. “옥자야. 뛰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 “싫어…” “제발! 내 마지막 소원이야! 가서 은지 찾아!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야!”

그의 절규가 눈보라를 갈랐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여기서 같이 죽을 것인가. 아니면 그가 만든 틈을 타서 도망쳐, 그가 지키려던 아이를 찾고 복수를 할 것인가. 나는 눈물을 머금고 뒷걸음질 쳤다. 그의 등이, 그 굽고 초라한 등이 오늘따라 태산처럼 커 보였다.

나는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시야를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등 뒤에서 고함과 욕설이 들려왔다. 하지만 불길은 치솟지 않았다. 그가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이다. 나를 위해, 자신의 남은 생명을 태워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이 겨울의 끝에서, 나는 비로소 내 남편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다시 헤어졌다. 하지만 이번 이별은 15년 전과 달랐다. 그때는 버림받았지만, 지금은 사랑받고 있었다. 그 확신이 나를 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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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막 – 4부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차가운 공기가 기도로 넘어갈 때마다 쇠 맛이 났다. 나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등 뒤에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경찰차인가, 소방차인가. 그가 불을 질렀을까? 아니면 잡혀갔을까?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나는 골목길로 숨어들었다.

어두운 골목 구석, 쓰레기 더미 옆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그가 쥐여준 지갑을 꺼냈다. 그 안에는 현금 몇 푼과 신분증, 그리고 아까 내가 주웠던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고아원 후원 방문 기념. 미란이와 함께.] 그리고 사진 귀퉁이에 적힌 작은 주소. ‘서울시 은평구… 희망 보육원.’

이곳이다. 그가 말한 ‘은지’라는 아이가 있는 곳. 나는 떨리는 다리를 손으로 내리치며 일어섰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김철수가 목숨을 걸고 벌어준 시간이다. 나는 택시를 잡기 위해 큰길로 나갔다. 눈보라는 여전히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택시 안에서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저녁 서울의 한 공원에서 70대 남성이 인화 물질을 뿌리고 난동을 부리다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이 남성은 과거 중견 건설 업체 대표였던 김 모 씨로 밝혀졌으며…” 체포. 다행이다. 죽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절망적이었다. 경찰서. 그곳은 안전한 곳이 아니다. 그가 말했다. 경찰 윗선도 그놈들 한통속이라고. 그는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이다. 시간이 없다. 놈들이 손을 쓰기 전에 증거를 찾아야 한다.

한 시간 후, 택시는 낡은 건물 앞에 멈췄다. 희망 보육원. 간판의 불은 꺼져 있었고, 건물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나는 철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문 좀 열어주세요!” 한참 뒤, 인터폰에서 졸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이 밤중에.” “김철수 씨…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은지를 만나야 해요.”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철문이 덜컥 열렸다.

원장실로 안내되었다. 나이 지긋한 수녀님이 차를 내왔다. “철수 형제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경찰에 잡혀갔어요. 아이를 보호해 달라고 했습니다.” 수녀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은지는… 지금 많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 낯선 남자들이 주변을 얼쩡거린다고 해서 별관 창고방에 숨겨두었어요.” 수녀님은 나를 건물 뒤편의 낡은 창고로 안내했다. “은지야, 아빠가 보낸 분이 오셨어.”

문이 열리고, 작은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열네 살. 사진 속의 그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빛은 달랐다. 잔뜩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손에는 몽둥이를 꼭 쥐고 있는 모습. 마치 공원에서 쇠파이프를 든 놈들과 맞서던 김철수의 눈빛을 닮아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도,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누구세요?” 아이가 경계하며 물었다. “…아빠 친구야.” 나는 차마 전처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빠는요? 왜 아빠가 안 오고 아줌마가 왔어요?” “아빠는… 좀 바빠서. 나한테 대신 가보라고 했어.” “거짓말.” 아이는 단호했다. “아빠한테 무슨 일 생겼죠? 뉴스에 나온 그 할아버지… 우리 아빠 맞죠?”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해 본 모양이었다. 아의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나 때문에… 나 지키려다가 잡혀간 거죠?”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몽둥이를 쥔 손을 감싸 쥐었다. 손이 얼음장처럼 찼다. “아냐. 네 탓 아냐. 어른들이 잘못해서 그런 거야.” “아빠가 그랬어요. 이 가방… 절대 뺏기면 안 된다고. 이게 아빠 목숨이라고.” 아이는 구석에 놓인 분홍색 백팩을 가리켰다. 그 낡은 가방. 김철수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또 하나의 목숨.

나는 가방을 열었다. 교과서와 공책들 사이에 검은색 USB 하나와 두툼한 장부가 들어 있었다. 장부를 펼쳐보았다. 깨알 같은 숫자들과 이름들. 그리고 맨 앞장에 김철수의 글씨체로 적힌 메모. [이 장부는 강 회장의 비자금 및 불법 로비 내역 원본이다. 나 김철수는 강 회장의 지시로 이 모든 일을 수행했으나, 15년 전 횡령 누명을 쓰고 축출당했다. 나는 죄인이다. 하지만 내 아내는 죄가 없다.]

또 내 이야기다. 이 바보 같은 남자는 비자금 장부에도 내 무고함을 적어 놓았다. 나는 USB를 쥐고 아이를 보았다. “은지야. 이거 나한테 줄 수 있니?” “아줌마가 누군지 알고 줘요? 아빠를 구할 수 있어요?” 아이의 눈빛이 매서웠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주민등록증. 박옥자. 그리고 김철수의 지갑에서 꺼낸 가족사진. 비록 아들 민우는 죽고 없지만, 우리 셋이 환하게 웃고 있는 옛날 사진.

“내가… 철수 씨 아내란다.” 아이의 눈이 커졌다. “…사모님?” “사모님은 무슨. 그냥 할머니야.”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네 아빠가 평생 사랑했던, 그리고 평생 미안해했던 사람이야. 그러니까 날 믿어주겠니?”

아이는 한참 동안 내 얼굴과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와락 내 품에 안겼다. “할머니… 아빠 좀 살려주세요… 아빠 죽으면 안 돼요…” 아이의 울음소리가 창고 안을 울렸다. 나는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마른 등이었다. 김철수의 등처럼 앙상하고 가여운 등. 나는 이 아이를 안으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김철수가 15년 동안 밖으로 돌면서도 외롭지 않았던 이유를. 그에게는 이 아이가 있었다. 내가 주지 못한 위로를, 이 피 섞이지 않은 딸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질투는 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내 남편의 곁을 지켜줘서. 그가 괴물로 변하지 않게 잡아줘서.

“가자.”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어디로요?” “아빠 구하러.”

우리는 보육원을 나왔다. 눈은 그쳐 있었지만, 바람은 더 차가워졌다. 나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며 강태식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며칠 전 택배를 보냈던 그 이름. 김철수가 믿었던 유일한 법적 대리인.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김철수 씨?” “아뇨. 박옥자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 “…아, 사모님.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철수 씨, 지금 어디 있습니까?” “경찰서 유치장에 있다가… 쓰러지셔서 지금 경찰 병원으로 이송 중입니다.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그놈들은요? 강 회장 쪽 사람들요.” “벌써 손을 썼습니다. 병원 병실 앞을 경찰이 지키고 있지만, 그 경찰들도 매수된 것 같습니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증거… 찾았습니다. 장부랑 USB.” “정말입니까?” 변호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거면 됩니다! 그걸 가지고 검찰청으로 바로 오셔야 합니다. 제가 아는 특수부 검사님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아니요.” 나는 단호하게 잘랐다. “병원으로 갑니다.” “사모님! 위험합니다! 거기 가면 놈들에게 증거까지 뺏길 수 있습니다!” “내 남편이 거기 있다잖아요. 혼자 죽게 둘 수 없어요.” “하지만…” “변호사 양반. 당신은 법대로 해요. 나는 내 방식대로 할 테니까. 검사님한테는 병원으로 오라고 하세요. 거기서 판을 엎어버릴 거니까.”

전화를 끊었다. 손이 땀으로 흥건했다. 미친 짓이다. 증거를 가지고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짓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김철수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내가 올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죽지 못할 것이다.

“할머니… 무서워요.” 옆에 앉은 은지가 내 옷자락을 잡으며 떨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겁먹지 마. 우리가 이겨.” “어떻게요?” “우린 잃을 게 없거든.”

나는 창밖을 보았다. 서울의 밤거리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불빛 어딘가에, 내 남편을 벼랑 끝으로 몬 자들이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을 것이다. 늙은 노인 하나 처리했다고 안도하며 웃고 있겠지. 웃을 수 있을 때 웃어둬라. 너희들이 건드린 건 힘없는 치매 노인이 아니다. 평생 칼자루 대신 식칼을 쥐고, 콘크리트 대신 무를 썰며 살아온 대한민국의 아줌마다. 독기 품은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마.

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 입구는 경찰차와 검은색 세단들로 어수선했다. 나는 은지에게 내 목도리를 둘러 얼굴을 가려주었다. “내 뒤에 딱 붙어서 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가방 놓치면 안 돼.” “네.” 우리는 응급실로 들어갔다. 입구에 서 있던 덩치 큰 사내들이 우리를 막아섰다. “어디 가십니까? 면회 안 됩니다.” 그 놈들이다. 공원에서 봤던 그놈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쏘아붙였다. “보호자다. 비켜.” “보호자라도 안 됩니다. 지금 수사 중이라…” “수사? 웃기고 있네. 깡패 새끼들이 언제부터 수사관 노릇을 했어?” 내 고함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할망구가 돌았나.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그때였다. “비키세요!” 어디선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태식 변호사였다. 그리고 그 뒤로 양복을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와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특수부 윤 검사입니다! 공무 집행 방해로 체포하기 전에 비키세요!” 검사의 외침과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사내들이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그 틈을 타 나는 은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뛰었다.

“철수 씨! 김철수!” 나는 복도를 달리며 소리쳤다. 간호사들이 놀라서 쳐다봤지만 상관없었다. 가장 안쪽, 경찰 두 명이 지키고 있는 병실이 보였다. 나는 경찰들을 밀치고 문을 열었다.

병실 안은 고요했다. 침대 위에 그가 누워 있었다. 산소호흡기를 낀 채, 온몸에 링거 줄을 주렁주렁 매달고.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그 앙상한 손목에 채워진 차가운 쇠붙이. 그것을 보는 순간, 내 안의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가족을 지키고, 아이를 지키려 한 게 죄란 말인가.

“여보…” 내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하지만 맥박은 뛰고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하지만 끈질기게. “나 왔어. 옥자 왔어.”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이 떠졌다. 탁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리고 내 뒤에 서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 산소 마스크 안에서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왔구나…’

그는 안도감에 눈을 감았다.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그때, 병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강 회장님 오십니다! 길 비키세요!” 강 회장. 모든 비극의 원흉. 그가 제 발로 찾아왔다. 마지막 확인 사살을 하러 온 모양이었다.

나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은지가 내 옷자락을 잡고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가방 줘.” 은지가 분홍색 가방을 내밀었다. 나는 가방을 받아 들고 돌아섰다. 병실 문이 열리고, 휠체어를 탄 늙은 노인과 수행원들이 들어왔다. 기름진 얼굴, 탐욕스러운 눈빛. 강 회장이었다.

“김 사장, 아직 안 죽었나?” 그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자네가 훔쳐 간 장부만 내놓으면, 병원비랑 장례비는 넉넉히 챙겨주지.” 그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가방을 들어 보였다. “이거 찾아요?” 강 회장의 눈이 번쩍였다. “오, 제수씨가 가지고 있었군. 이리 줘요. 그럼 다 끝나는 거야.” 수행원 하나가 손을 뻗었다. 나는 가방을 뒤로 숨기지 않았다. 대신, 가방 지퍼를 열고 장부를 꺼냈다.

“끝나는 건 우리가 아니야.” 나는 장부를 높이 들었다. 병실 밖에서 대기하던 윤 검사와 기자들이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안에, 당신이 저지른 모든 더러운 짓들이 다 들어있어. 내 남편한테 뒤집어씌운 횡령, 탈세, 그리고 살인 교사까지.” “이 여자가 미쳤나! 그거 뺏어!” 강 회장이 소리쳤다. 수행원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윤 검사님! 지금입니다!”

내가 소리치자, 윤 검사가 병실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모두 동작 그만! 강태오 회장, 당신을 살인 미수 및 뇌물 공여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기자들이 셔터를 눌러댔다. 플래시 세례 속에서 강 회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거 놔!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강태오야!”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그 혼란 속에서 오직 한 사람만 보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남편.

나는 그에게 다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봤어요? 다 끝났어. 당신 이겼어. 우리가 이겼어.” 그가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손이 내 손을 꽉 잡았다. 그것은 마지막 힘을 다한, 생의 의지였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손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심박 측정기의 경고음이 불규칙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삐… 삐익… 삐… “안 돼… 여보, 안 돼…”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 아니야. 나 아직 당신 용서 안 했어. 이렇게 가면 안 돼. 일어나! 일어나서 나한테 싹싹 빌고 가란 말이야!” 나의 절규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입가에 아주 편안한, 15년 만에 처음 보는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12월 23일 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나의 남편이자 나의 원수, 그리고 나의 유일한 사랑이었던 김철수가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오늘 밤이 고비라고 했다. 나는 그의 곁을 지켰다. 한 손은 그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은지의 손을 잡고. 우리는 기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가 떠나는 길이 너무 춥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Word Count: 3350] [Hồi 2 종료]

제3막 – 1부

폭풍이 지나간 자리는 고요했다. 병실 안은 숨 막힐 듯 조용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심전도 모니터 소리만이 이곳이 삶과 죽음의 경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삐… 삐… 삐… 나는 그 소리에 맞춰 숨을 쉬었다.

강 회장은 구속되었다. 뉴스는 온통 그 이야기로 도배되었다. ‘재벌 회장의 두 얼굴’, ‘충직한 부하에게 덮어씌운 15년의 누명’. 세상은 떠들썩했지만, 정작 그 폭풍의 중심에 있었던 내 남편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물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수갑이 풀린 손목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평생 일만 하다가, 마지막에는 수갑까지 찼던 가여운 손목. 나는 그 자국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수고했어요… 이제 다 끝났어.”

병실 구석 간이침대에는 은지가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작은 등. 저 아이도 지난 며칠간 지옥을 오갔으리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아버지를 살리겠다고, 그 무서운 장부를 들고 나를 찾아온 아이. 나는 담요를 가져와 아이의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아이가 잠결에 “아빠…” 하고 웅얼거렸다. 그 소리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기묘한 가족이었다. 전처, 전남편, 그리고 전남편이 입양한 딸.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할지 몰라도, 지금 이 병실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지키는 유일한 울타리였다.

새벽 3시. 그가 눈을 떴다. 아주 미약한 움직임이었지만, 내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가락이 까딱였다. “여보?” 내가 벌떡 일어나 그의 얼굴을 살폈다. 산소 마스크 안에서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탁했던 눈빛이 잠시 맑아지는 듯했다. 그는 나를 보고, 그리고 잠든 은지를 보았다. 안도감.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 그가 마스크 안에서 입모양으로 말했다. 나는 거즈에 물을 적셔 그의 입술을 축여주었다. 그는 마른땅이 비를 흡수하듯 물기를 빨아들였다. “살았네… 나…”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래요. 살았어요. 당신이 이겼고.” “강 회장은…?” “잡혀갔어요. 당신이 다 밝혔잖아. 이제 당신 건드릴 사람 아무도 없어.”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는, 힘겨운 미소였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는 다시 눈을 감으려 했다. 이대로 다시 혼수상태에 빠지면 영영 못 일어날지도 모른다. 나는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자지 마요! 나랑 얘기 좀 해.” 그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왜… 나 졸린데…” “집에 가야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야? 밥해놨단 말이야.” 내 말에 그의 눈이 커졌다. “집…?” “그래, 우리 집. 당신이 빗자루질 해놓은 마당이랑, 고치다 만 보일러실 있는 그 집.” 그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는 링거 줄이 주렁주렁 매달린 팔을 들어 허공을 휘저었다.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했다. 내가 그 손을 잡아주자, 그가 내 손을 뺨에 가져다 댔다. “가고 싶어… 옥자야… 나 집에 데려가 줘.” “그래, 가자. 내가 데려갈게.” “여기서 죽기 싫어… 소독약 냄새 싫어… 네 밥 냄새 맡으면서… 그렇게 가고 싶어.”

의사는 반대했다. 지금 퇴원하면 길에서 죽을 수도 있다고, 통증 조절이 안 될 거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나는 고집을 부렸다. “이 사람이 원해요. 병원에서 기계 소리 들으며 죽게 할 순 없어요.” 강태식 변호사도 내 편을 들어주었다. “사모님 뜻대로 하시죠. 제가 구급차와 의료진을 지원하겠습니다. 회장님… 아니 형님도 그걸 원하실 겁니다.” 변호사는 눈시울을 붉히며 모든 수속을 밟아주었다. 알고 보니 그는 철수 씨가 몰래 대학 등록금을 대주었던 고학생 출신이었다. 김철수. 이 바보 같은 남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씨앗을 뿌려놓고 다녔던 걸까. 자신은 굶으면서 남을 먹이고, 자신은 악역을 자처하면서 남을 살렸다.

아침이 밝자마자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사설 구급차를 타고 가는 길,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은지는 조수석에 탔고, 나는 뒤에서 그의 손을 잡고 앉았다. 그는 창밖 풍경을 눈에 담으려는 듯 애를 썼다. “눈이… 예쁘다.” “당신 눈 쓸기 싫어했잖아.” “아냐… 좋아했어. 네가 눈 오는 날 좋아해서… 나도 좋아했어.” 그는 이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가면이 벗겨진 그는, 15년 전의 순수했던 청년 김철수로 돌아와 있었다.

집에 도착했다. 대문 앞에 구급차가 멈추자,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내다보았다. 나는 당당하게 그를 휠체어에 태워 내렸다. “비키세요. 집주인 들어갑니다.” 사람들이 길을 터주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앙상한 몸을 웅크리고 있었지만, 표정만은 왕의 귀환처럼 평온했다. “다녀왔습니다…” 그가 대문을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담긴 깊은 회한과 안도가 내 가슴을 울렸다. 15년 만의 진짜 귀가였다.

방에 그를 눕혔다. 미리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어놔서 방바닥이 절절끓었다. “아, 따뜻하다.” 그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탄성을 질렀다. “역시… 내 집이 최고야.” 그는 행복해 보였다. 병원에서의 그 창백하고 고통스러운 얼굴은 사라지고, 마치 여행에서 돌아와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는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은지가 머리맡에 앉아 그의 팔을 주물렀다. “아빠, 시원해?” “응… 우리 딸 손이 약손이네.” 그가 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은지가 얼른 머리를 숙여 그의 손바닥에 비볐다. “아빠, 죽지 마. 나랑 여기서 살자. 할머니랑 셋이서.” “그래… 그러자…” 그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날 저녁, 나는 그가 제일 좋아했던 김치찌개를 끓였다. 돼지고기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묵은지를 푹 끓여낸 찌개. 냄새가 방 안으로 퍼지자 그가 코를 킁킁거렸다. “밥 줘, 옥자야.” “먹을 수 있겠어요? 소화 안 될 텐데.” “국물이라도… 한 숟가락만.” 나는 그를 일으켜 앉히고 밥상을 차렸다. 그는 숟가락을 들 힘조차 없어, 내가 떠먹여 주어야 했다. 붉은 국물을 한 모금 삼키고는, 그는 눈을 감고 음미했다. “이 맛이야… 내가 이 맛을 잊지 않으려고… 그 고생을 했어.” “바보. 이게 뭐라고.” “이게 내 인생이야. 옥자 네가 내 인생이고.”

눈물이 툭 떨어져 찌개 그릇에 빠졌다. 나는 얼른 눈물을 훔치며 밥을 말았다. “더 먹어요. 먹고 힘내서 나랑 싸워야지. 15년 동안 속 썩인 거 다 갚으려면 오래 살아야 할 거 아냐.” “갚아야지… 다 갚을게. 저승 가서도 갚을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우리는 울다가 웃으며 밥을 먹었다. 생의 마지막 만찬일지도 모르는 그 소박한 밥상이, 세상 어떤 산해진미보다 귀하게 느껴졌다.

밤이 깊었다. 은지는 피곤했는지 건넛방에서 잠이 들었고, 방에는 나와 그, 단둘만 남았다. 그는 통증이 심해지는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진통제 주사를 거부했다. “안 맞아. 정신이 몽롱해지는 거 싫어. 너랑 있는 시간… 1분 1초도 놓치기 싫어.”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옥자야.” “응.” “나… 그 여자랑 잔 적 없어.” 그가 불쑥 말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알아. 각서 봤다니까.” “아니, 그거 말고. 15년 동안… 너 말고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았어. 내 몸도, 마음도… 다 네 거야.” “늙은이가 주책은.” “진짜야. 나 깨끗해. 그러니까… 나중에 나 가면, 너무 미워하지 말고… 가끔 생각은 해줘.”

그의 고백은 유치했지만 진실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나에게 남겨질 기억 속에, 배신자가 아닌 순정남으로 남고 싶은 것이다. “알았어요. 생각할게. 매일매일 생각할게.” “그리고… 장롱 서랍 열어봐. 맨 아래칸.” “거기 뭐 있는데?” “가보면 알아.”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장롱 서랍을 열었다. 낡은 신문지 밑에, 작은 벨벳 상자가 하나 있었다. 열어보니 금반지 두 개가 나왔다. 투박한 디자인의 순금 쌍가락지. “이게 뭐야?” “우리… 결혼할 때 반지 못 해줬잖아. 나중에 돈 벌면 해준다고 했는데… 너무 늦었지?” 그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노가다판 뛰면서 조금씩 돈 모아서 샀어. 너한테 끼워주고 싶었는데… 내 손이 너무 더러워서 못 주겠더라.”

나는 반지를 꺼내 내 손가락에 끼웠다. 딱 맞았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를 꺼내 그의 약지에 끼워주었다. 뼈만 남은 손가락이라 반지가 헐거워서 뱅글뱅글 돌았다. 그 모습이 너무 가여워서,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이 바보야… 이런 건 미리미리 줬어야지. 이제 와서 주면 어떡해.”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그는 내 눈물을 닦아주려 손을 뻗었지만, 힘이 없어 툭 떨어졌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내 볼에 비볐다. 거칠고 투박한 손.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손. “사랑해, 여보.” 내가 말했다. 15년 동안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말. 증오의 껍질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그 말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 “나도… 나도 사랑해, 옥자야. 죽도록 사랑해.”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한참을 있었다. 창밖에는 눈보라가 멈추고, 달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 달빛이 우리 두 사람을 비췄다. 오해와 증오로 얼룩졌던 15년의 세월이, 그 달빛 아래서 하얗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얼마 없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어떤 거짓도 없는 순수한 사랑의 시간.

그가 잠들었다.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나는 잠들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지켜보며, 그의 숨소리를 하나하나 세며 밤을 지새웠다. 이 밤이 지나면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들을, 내 영혼에 새겨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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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막 – 2부

다음 날 아침, 눈이 그쳤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눈 부시게 하얬다. 그 빛이 방 안 깊숙이 들어와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는 밤새 앓았던 열이 내린 듯, 창백하지만 평온한 얼굴로 눈을 떴다. 반사광(反射光).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가장 밝게 타오르는 순간임을 나는 직감했다.

“옥자야.” 그의 목소리가 어제보다 또렷했다. “나… 면도 좀 해줘.” “면도? 힘든데 괜찮겠어요?” “깔끔하게 가고 싶어. 네 남편… 거지꼴로 기억되기 싫어.”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오고, 그가 쓰던 낡은 면도기와 비누를 챙겼다. 그를 비스듬히 안아 일으켜 내 가슴에 기대게 했다. 그의 머리가 내 어깨에 묵직하게 닿았다.

비누 거품을 내어 그의 턱과 볼에 발랐다. 하얀 거품이 검버섯 핀 그의 얼굴을 덮었다. 사각, 사각. 면도날이 수염을 깎아내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기 피부를 다루듯 살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숨결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규칙적이지만 얕은 숨결.

“기억나?” 그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결혼식 날… 네가 내 눈썹 다듬어 준 거.” “기억나지. 당신 눈썹이 숯검댕이 같아서 촌스럽다고 내가 다 밀어버렸잖아.” “그때 참… 행복했는데.” “지금은? 지금은 불행해?” “아니.”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이 더 좋아. 그때는 철이 없어서 몰랐던 걸… 지금은 아니까. 네 손길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걸… 이제야 아니까.”

면도가 끝났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니, 핼쑥하긴 해도 제법 말끔한 신사 같았다. “잘생겼네, 김철수.” “박옥자 남편인데 그 정도는 돼야지.”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웃음 끝에 울음이 매달려 있었다.

그때, 대문 초인종이 울렸다. 강태식 변호사였다. 그는 검은색 서류 가방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형님… 오셨습니까.” 변호사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변호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식아, 고생 많았다. 내 마지막 부탁… 들어줄 수 있겠지?” “말씀만 하십시오.” “그 서류… 옥자한테 줘.”

변호사가 가방에서 누런 봉투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봉투였다. 겉면에는 ‘15년 뒤의 옥자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뭐예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낡은 편지지 한 장과, 낡은 집문서, 그리고 열쇠 하나가 들어 있었다. 집문서? 자세히 보니 우리 가게 옆, 오랫동안 비어 있던 공터의 등기 권리증이었다. 매입 날짜는 15년 전, 그가 집을 나가기 직전이었다.

“여보… 이건…”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 꽃 좋아하잖아. 나중에 늙으면… 꽃밭 가꾸면서 살고 싶다고 했잖아.” 기억이 났다. 젊은 시절, 팍팍한 살림에 치여 살면서도 나는 늘 꽃타령을 했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가게 옆에 작은 정원 하나 만들어줘요. 거기서 꽃 심고 차 마시게.’ 지나가는 말로 했던 그 소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집을 나가면서… 그 땅을 샀어. 빚쟁이들한테 뺏기지 않으려고… 태식이 이름으로 돌려놨다가… 이제야 네 앞으로 돌리는 거야.”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거기에… 꽃 심어, 옥자야. 봄이 오면… 예쁜 꽃 심어서… 나 보러 와줘.”

나는 집문서를 가슴에 품고 오열했다. “바보야… 꽃밭이 무슨 소용이야. 네가 없는데… 네가 없는데 꽃이 무슨 소용이야!” “내가 거기 있을게. 꽃으로 피어날게. 그러니까 울지 마… 나 때문에 울지 마…”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오후가 되자 그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은지가 그의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아빠… 아빠 가지 마…” 그는 은지의 손을 잡으려 애썼다. “은지야… 우리 딸… 미안하다. 아빠가… 끝까지 못 지켜줘서.” “아냐, 아빠가 다 지켜줬어. 아빠가 최고야.”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착하게 커야 한다. 아빠가 하늘에서… 지켜볼게.” 그는 은지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피보다 진한 사랑으로 맺어진 부녀의 이별이었다.

해가 질 무렵, 그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 귀를 그의 입가에 대야 했다. “옥자야…” “응, 여보. 나 여기 있어.” “시간이… 다 됐나 봐.” “가지 마… 조금만 더 있다 가. 응? 하루만… 딱 하루만 더 있다 가.” “춥다… 좀 안아줘.”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그의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등 뒤에서 그를 감싸 안으며, 내 체온을 나누어 주었다. 그의 몸이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마치 불 꺼진 난로처럼. 하지만 내 품 안의 그는 편안해 보였다. “따뜻하다… 옥자 품이… 제일 따뜻해.” 그가 중얼거렸다. “졸려… 이제 좀 잘게.” “그래… 자요. 내가 지켜줄게.”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길게, 아주 길게 내뱉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내 품 안에 있던 그의 가슴이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았다. 방 안의 공기가 멈췄다. 시계 초침 소리도, 바람 소리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듯했다. 오직 내 심장 소리만이 쿵, 쿵, 하고 울렸다.

“여보?” 나는 그를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김철수 씨?”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눈을 감은 채,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고통도, 후회도 없는, 완벽한 평화. 그는 갔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긴 여행을 끝내고 영원한 휴식으로 들어갔다.

“으흐흑…”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의 식어가는 몸을 으스러져라 끌어안고 통곡했다. “고생했어… 정말 고생했어… 이제 아프지 마… 거기선 아프지 말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나 기다려…” 은지도 내 옆에 엎드려 목놓아 울었다. 우리의 울음소리가 겨울밤의 적막을 깨고 높이 높이 올라갔다. 눈이 그친 밤하늘에는 별이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그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윙크하는 것처럼.

장례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그의 유언대로 부고를 알리지 않고, 가족끼리 조용히 보냈다. 강 회장이 구속된 탓인지, 아니면 김철수의 마지막 의기를 존중해서인지,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다.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한 그를 받아 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 거대했던 사람,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사람이 이제 이 작은 함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 가볍다. 한 사람의 인생이 참으로 가볍다. 하지만 그가 남긴 사랑의 무게는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를 보내고 돌아온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춥지 않았다. 그가 머물다 간 자리마다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가 고쳐놓은 보일러실 문은 더 이상 삐걱거리지 않았고, 그가 썰어놓은 무 말랭이는 마당에서 꾸들꾸들 잘 마르고 있었다. 그는 떠났지만, 떠나지 않았다. 내 집 구석구석에, 그리고 내 가슴속에 그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일주일 뒤. 나는 변호사에게 받은 열쇠를 들고 가게 옆 공터로 나갔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동안 안이 보이지 않았던 곳이다. 녹슨 철문을 열쇠로 열었다. 끼이익. 무거운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일 줄 알았는데, 그곳은 이미 정원이었다. 비록 겨울이라 꽃은 없었지만, 잘 다듬어진 흙과, 곳곳에 심어진 묘목들. 그리고 한가운데 놓인 벤치 하나. 벤치 등받이에 작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옥자의 정원]

그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15년 동안 틈틈이 이곳에 와서 땅을 고르고 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언젠가 내가 이곳에 돌아와 쉴 수 있도록. 자신은 들어오지 못할지라도, 나만은 이곳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며.

나는 벤치에 앉았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 마음은 봄날처럼 따뜻해졌다. 눈물이 났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의 눈물이었다. “고마워요, 여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약속 지킬게. 여기에 예쁜 꽃 많이 심을게. 당신이 심심하지 않게, 사시사철 꽃이 피는 정원으로 만들게.”

바람이 불었다. 겨울바람인데도 훈훈했다. 바람결에 그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오래된 스킨 냄새, 흙냄새, 그리고 밥 냄새. 나는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느꼈다. 그가 내 볼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잘 있어, 옥자야.’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잘 가요, 내 사랑.’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보내주었다. 진정한 이별은 잊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하는 것임을 이제는 안다.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이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올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 봄에는, 내 정원에, 그리고 내 인생에 다시 꽃이 필 것을 믿기에. 나는 옷깃을 여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로 돌아가야 한다. 은지가 배고프다고 할 시간이다. 나는 밥을 지어야 한다. 그가 남겨준 사랑으로, 나는 남은 생을 힘차게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그에 대한 최고의 보답이니까.

[Word Count: 2750]

제3막 – 3부 (최종화)

봄은 늘 그렇듯, 소리 없이 찾아왔다. 겨울내내 꽁꽁 얼어붙었던 수도꼭지가 녹아 물이 졸졸 흐르고, 마당 구석에 쌓여 있던 눈더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초록색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호미를 들고 땅을 팠다. 흙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겨울의 혹독함을 견뎌낸 땅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명의 냄새가 났다.

“할머니! 다녀오겠습니다!” 대문 밖에서 은지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허리를 펴고 담장 너머를 내다보았다. 새 교복을 입은 은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남색 재킷에 체크무늬 치마. 제법 의젓해 보이는 모습이 대견했다. “그래, 차 조심하고. 오늘 급식 맛없으면 그냥 오지 말고 매점 가서 빵 사 먹어.” “아이, 참. 할머니 반찬 싸 갔잖아. 친구들이랑 나눠 먹을 거야.” 은지는 배시시 웃으며 골목길을 뛰어 내려갔다. 그 뒷모습에서 문득문득 그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도, 걷는 폼이나 웃을 때 눈이 반달이 되는 게 영락없는 김철수 판박이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나는 다시 흙을 골랐다. 이곳은 ‘옥자의 정원’이다. 그가 내게 남기고 간 마지막 선물. 겨울에는 황량한 공터였지만, 지금은 온 동네에서 가장 화려한 꽃밭으로 변신 중이었다. 그가 미리 심어두었던 구근들이 땅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올라오고 있었다. 수선화, 튤립, 그리고 히야신스. 이름도 어려운 꽃들이 앞다퉈 꽃망울을 터뜨렸다. 나는 그 꽃들을 볼 때마다 그와 대화를 나눈다.

“여보, 이거 봐. 당신이 심은 튤립이 폈어. 노란색이네. 당신 노란색 좋아했나?” 대답은 없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이 꼭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 나는 벤치에 앉아 땀을 식혔다. 벤치 옆에는 작은 비석 하나를 세워두었다. 거창한 비석은 아니고, 냇가에서 주워 온 예쁜 돌에 내가 직접 글씨를 새긴 것이다. [김철수, 여기 잠들다.] 그는 화장해서 강물에 뿌려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유골함에서 한 줌을 덜어 이 나무 밑에 묻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내 곁, 꽃밭 한가운데에.

가게 문을 열 시간이 되었다. 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가게로 들어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얼굴이 폈네, 폈어.” 생선 가게 박 씨 아줌마가 지나가다 인사를 건넸다. “봄 타나 봐. 자꾸 웃음이 나오네.” “그러게. 옛날엔 찬바람이 쌩쌩 불더니, 요즘은 아주 봄 처녀 같아. 연애해?” “연애는 무슨. 늙어서 주책이야.” 나는 손사래를 쳤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독기 서린 ‘이혼녀 반찬 가게 주인’이 아니라, 꽃을 가꾸는 ‘인자한 할머니’로 봐주는 것 같아서. 이것도 다 당신 덕분이야. 당신이 내 독기를 다 가져가 버렸으니까.

오후 늦게, 양복 입은 신사가 가게로 들어왔다. 강태식 변호사였다. 그는 이제 단골손님이 되었다. “사모님, 김치 좀 사러 왔습니다. 저번 갓김치가 아주 예술이더라고요.” “어서 와요. 오늘은 파김치가 잘 익었는데 좀 싸줄까?” 나는 덤으로 파김치를 꾹꾹 눌러 담아주었다. 변호사는 봉투를 받아 들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오늘… 강 회장 선고 공판이 있었습니다.” 내 손이 잠시 멈칫했다. “…어떻게 됐어요?” “징역 15년. 확정됐습니다. 나이가 있어서 아마 살아서 나오긴 힘들 겁니다.” 15년. 공교롭게도 우리가 헤어져 있던 시간과 똑같다. 하늘의 장난일까, 아니면 공평한 심판일까. 그는 15년 동안 죄 없이 도망 다녔는데, 죄지은 자는 이제부터 15년 동안 갇혀 있어야 한다니.

“고생했어요, 변호사 양반. 철수 씨가 하늘에서 고마워할 거예요.” “아닙니다. 형님이 다 해놓고 가신 거죠. 저는 숟가락만 얹었습니다.” 변호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은지 양 입양 절차, 마무리됐습니다. 이제 법적으로 사모님 딸입니다. 가족관계증명서에 ‘박은지’로 올라갈 겁니다.” 박은지. 김은지가 아니라 내 성을 따서 박은지. 그것은 은지의 선택이었다. ‘아빠는 가슴에 묻었으니까, 이제 할머니 호적에 들어갈래. 할머니가 내 진짜 보호자잖아.’ 당돌한 녀석.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이제 진짜 세 식구가 됐네요. 나, 은지, 그리고 여기 있는 철수 씨.”

변호사가 돌아가고, 나는 가게 문을 닫았다. 오늘은 좀 일찍 닫고 싶었다. 특별한 날이니까. 달력을 보니 4월 5일이었다. 식목일이자,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그리고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지 딱 백일이 되는 날.

나는 정성스럽게 저녁상을 차렸다. 그가 좋아했던 잡채, 갈비찜, 그리고 맑은 소고기 뭇국. 은지가 학교에서 돌아와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오늘 무슨 날이야? 잔치해?” “응. 아빠한테 인사하는 날이야.” 우리는 정원 벤치에 돗자리를 펴고 상을 차렸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우리는 그의 비석 앞에 술 한 잔을 올렸다. 은지는 콜라를 따랐다.

“아빠, 나 시험 백 점 맞았어. 수학은 좀 망쳤지만… 그래도 영어는 백 점이야. 잘했지?” 은지가 비석을 쓰다듬으며 조잘거렸다. “아빠 닮아서 머리가 좋은가 봐. 나는 수학 젬병이었는데.” 내가 맞장구를 치자 은지가 까르르 웃었다. 우리는 그가 없는 식탁에 둘러앉아, 그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슬픔은 없었다. 그저 그리움이 맑은 물처럼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밥을 먹고 은지가 방으로 들어간 뒤, 나는 정원에 홀로 남았다.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손에 쥐고 벤치에 앉았다. 밤공기가 상쾌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그가 있을까. 아니면 내 옆에 앉아 이 꽃향기를 맡고 있을까.

문득, 지난 겨울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가 거지꼴로 대문 앞에 서 있었던 그날 밤.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냥 돌려보냈다면, 나는 평생 그를 오해하고 미워하며 살았겠지. 그리고 그는 차가운 길바닥에서 쓸쓸히 죽어갔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때 문을 연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아니,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그가 나를 찾아온 것도, 내가 그를 받아준 것도, 모두 정해져 있던 수순처럼 느껴졌다.

‘업(이, 業)’이라는 게 이런 걸까. 전생에 무슨 빚을 졌기에 우리는 이렇게 아프게 얽혔다가, 마지막 순간에야 서로를 알아보았을까.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 한 달의 시간. 지지고 볶고, 울고불고, 서로를 할퀴면서도 끌어안았던 그 치열했던 시간. 그것이 내 남은 생을 지탱할 힘이 되었다. 그는 15년의 부재를 단 한 달의 사랑으로 갚고 떠났다. 가성비가 좋아도 너무 좋은 남자다.

“여보.” 나는 허공에 대고 불렀다. “거긴 어때? 따뜻해? 밥은 잘 먹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응, 아주 좋아. 옥자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빼면.’ 그의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나도 보고 싶어. 아주 많이.”

나는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가 가방 속에 숨겨두었던 그 수첩. [나 김철수는 죄인이다.]라고 시작했던 그 일기장. 나는 그 뒷장에 새로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 글씨체로, 그에게 보내는 답장을.

[202X년 4월 5일. 오늘 정원에 수선화가 활짝 피었어요. 당신이 심은 거예요. 은지는 학교 잘 다니고 있어요. 밥도 잘 먹고, 아주 씩씩해요. 나는… 나는 이제 울지 않아요. 당신이 내게 준 이 봄날을 마음껏 즐기고 있거든요. 철수 씨. 당신은 죄인이 아니에요. 당신은 나의 영웅이었고, 나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고, 나의 마지막 사랑이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푹 쉬어요.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내가 갈 때까지… 거기서 꽃밭 가꾸며 기다려요. 그때는 내가 맛있는 팥죽 쑤어 줄게. 사랑해요. 영원히.]

나는 수첩을 덮고 가슴에 품었다. 따뜻했다. 마치 그의 심장이 내 가슴속에서 뛰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발밑에 무언가가 반짝였다. 반딧불이었다. 아직 반딧불이 나올 계절이 아닌데. 작은 빛 하나가 내 주위를 맴돌았다. 빙글, 빙글. 마치 춤을 추듯이. 나는 손을 뻗었다. 반딧불이가 내 검지 끝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깜빡, 깜빡. 그 빛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고마워. 사랑해. 잘 있어.’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미소 지었다. “그래… 알았어. 잘 가요.” 반딧불이는 다시 날아올라 밤하늘 높이 사라졌다. 그 빛이 사라진 자리, 밤하늘에 별 하나가 더 밝게 빛났다.

나는 집으로 들어왔다. 거실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은지는 세상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이불을 덮어주고 그 옆에 누웠다.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와 방 안을 은은하게 비췄다. 평화롭다. 이 고요함, 이 안락함. 67세, 이혼녀, 그리고 미망인. 내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는 많지만, 나는 이제 그 무엇도 상관없다. 나는 그저 ‘박옥자’다. 사랑을 했고, 사랑을 받았고, 사랑을 간직한 여자. 그거면 충분하다.

내일은 시장에 가서 여름 꽃 씨앗을 사야겠다. 봉숭아도 심고, 채송화도 심어야지. 그가 심심하지 않게 알록달록하게 꾸며줘야지. 그리고 은지랑 손잡고 냇가에 나가 다슬기도 잡아야겠다. 할 일이 많다. 살아야 할 이유가 너무나 많다.

나는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 그를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꿈에서는 그가 젊은 날의 모습으로, 말끔한 양복을 입고, 그 환한 미소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시장통 팥죽집에 앉아, 뜨거운 팥죽을 호호 불어가며 나누어 먹을 것이다. 영원히 식지 않는 그 따뜻한 팥죽을.

나의 겨울은 끝났다. 그리고 나의 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그가 선물해 준, 눈부시게 아름다운 봄이.

[Word Count: 2650] [총 단어 수: 약 28,500 단어] [THE END]

BƯỚC 1: DÀN Ý CHI TIẾT (KỊCH BẢN ĐIỆN ẢNH)

Tên kịch bản dự kiến: Mùa Đông Cuối Cùng Của Người Lạ (The Last Winter of a Stranger) Ngôi kể: Ngôi thứ nhất (“Tôi” – Nhân vật người vợ). Tổng số từ dự kiến: 28.000 – 30.000 từ.

1. HỒ SƠ NHÂN VẬT

  • Nhân vật chính (“Tôi”) – Park Ok-ja (67 tuổi):
    • Nghề nghiệp: Chủ một tiệm bán banchan (món ăn kèm) nhỏ ở ngoại ô Seoul.
    • Tính cách: Độc lập, ít nói, bên ngoài lạnh lùng nhưng bên trong yếu mềm. Bà tự hào về cuộc sống bình yên mình đã gầy dựng lại sau cú sốc ly hôn 15 năm trước.
    • Vết thương: Bị chồng bỏ rơi vì một người phụ nữ trẻ hơn khi bà 52 tuổi. Bà không bao giờ tha thứ cho sự phản bội đó.
  • Chồng cũ – Kim Cheol-soo (71 tuổi):
    • Hoàn cảnh: Từng là một giám đốc xây dựng phong độ. Hiện tại xuất hiện với vẻ ngoài rách rưới, run rẩy, mất hết phong thái.
    • Điểm đặc biệt: Luôn ôm khư khư một chiếc túi du lịch cũ nát bên mình, không cho ai chạm vào. Mắc chứng Alzheimer giai đoạn đầu (nhưng giấu kín).

2. CẤU TRÚC KỊCH BẢN

🟢 HỒI 1: VỊ KHÁCH KHÔNG MỜI (Khoảng 8.000 từ)

Mục tiêu: Thiết lập sự bình yên giả tạo của Ok-ja và cú sốc khi quá khứ quay lại.

  • Warm open: Cảnh Ok-ja làm kim chi trong sân nhà vào một buổi sáng mùa đông yên tĩnh. Sự hài lòng với cuộc sống đơn độc: nghe radio, uống trà, không phải phục vụ ai.
  • Biến cố (Inciting Incident): Tiếng chuông cửa vang lên. Cheol-soo đứng đó, tiều tụy, áo khoác sờn rách, đôi giày há mõm. Ông ta không dám nhìn thẳng vào mắt bà.
  • Xung đột: Ok-ja định đóng sầm cửa. Ký ức về ngày ông ta xách vali đi theo người tình 15 năm trước ùa về. Nhưng Cheol-soo quỳ xuống, nói câu: “Tôi đói quá… Cho tôi ăn bữa cơm rồi tôi đi ngay.”
  • Diễn biến:
    • Ok-ja cho ông vào nhà vì lòng trắc ẩn của người già, nhưng dặn lòng sẽ đuổi ông đi ngay sau bữa ăn.
    • Khi ăn, tay Cheol-soo run rẩy làm rơi vãi cơm. Ông ăn như một con thú đói. Ok-ja nhìn thấy vết sẹo trên tay ông – vết sẹo do bà vô tình gây ra 30 năm trước.
    • Cheol-soo nói ông đã mất tất cả: phá sản, người tình bỏ đi, con cái từ mặt. Ông xin tá túc vài ngày.
  • Nghi ngờ (Seed): Ok-ja để ý Cheol-soo lén nhìn cuốn lịch treo tường và đánh dấu ngày tháng. Ông ta nói dối về lý do quay lại. Bà biết ông không chỉ cần chỗ ngủ, ông đang trốn chạy hoặc chờ đợi điều gì đó.
  • Kết Hồi 1 (Cliffhanger): Đêm đó, Ok-ja thức giấc, thấy Cheol-soo ngồi trong bóng tối phòng khách, ôm chiếc túi cũ, khóc không thành tiếng và lẩm bẩm: “Xin lỗi, tôi sắp không nhớ được nữa rồi…” Bà quyết định cho ông ở lại, không phải vì tha thứ, mà để xem ông đang giấu giếm điều gì.

🔵 HỒI 2: NHỮNG MẢNH VỠ CỦA KÝ ỨC (Khoảng 12.000 – 13.000 từ)

Mục tiêu: Sự va chạm giữa hận thù và thương cảm, hé lộ bí mật dần dần.

  • Chung sống bất đắc dĩ:
    • Ok-ja đối xử lạnh nhạt, coi ông như người ở trọ. Cheol-soo cố gắng làm việc nhà để trả ơn nhưng luôn làm hỏng (đánh vỡ bát, quên tắt bếp gas).
    • Những tình huống dở khóc dở cười xảy ra, gợi nhắc lại thói quen cũ của hai người. Có những khoảnh khắc họ quên mất mình đã ly hôn.
  • Dấu hiệu bất thường:
    • Ok-ja phát hiện Cheol-soo hay đi lạc trong chính ngôi nhà cũ. Ông gọi tên bà là tên con gái đã mất của họ (đứa con mất khi mới sinh).
    • Bà tìm thấy vỉ thuốc lạ trong thùng rác nhưng không tra cứu được là thuốc gì.
  • Twist giữa hồi (Midpoint): Một người đàn ông lạ mặt đến tìm Cheol-soo, đòi nợ. Ok-ja nghĩ rằng ông quay về để lừa tiền bà trả nợ. Bà nổi giận đuổi ông đi.
    • Cheol-soo chấp nhận ra đi, để lại chiếc túi.
    • Khi ông đi rồi, Ok-ja mở chiếc túi: Bên trong không phải quần áo bẩn, mà là những cuốn sổ tiết kiệm mang tên Ok-ja được gửi đều đặn suốt 15 năm qua, và một tập hồ sơ bệnh án ung thư não giai đoạn cuối, kèm chứng mất trí nhớ.
  • Sự thật về sự phản bội:
    • Ok-ja chạy đi tìm ông giữa trời tuyết. Bà tìm thấy ông đang co ro ở bến xe buýt, tay cầm tấm ảnh cưới cũ nát.
    • Khi được đưa về, trong cơn mê sảng, Cheol-soo nói ra sự thật: 15 năm trước, ông không ngoại tình. Ông bị vướng vào một vụ lừa đảo lớn, sợ xã hội đen làm hại Ok-ja nên ông dựng màn kịch ngoại tình để ép bà ly hôn, bảo vệ tài sản cho bà.
  • Cao trào cảm xúc: Cheol-soo tỉnh lại nhưng không nhận ra Ok-ja nữa. Ông nhìn bà và hỏi: “Cô ơi, cô có thấy vợ tôi đâu không? Cô ấy thích ăn canh kim chi lắm…” Ok-ja bật khóc, nấu cho ông bát canh kim chi, đóng vai “người lạ” chăm sóc chồng mình.

🔴 HỒI 3: MÙA XUÂN TRONG TÂM TƯỞNG (Khoảng 8.000 từ)

Mục tiêu: Giải tỏa, tha thứ và ý nghĩa nhân sinh.

  • Sự chăm sóc cuối cùng:
    • Sức khỏe Cheol-soo suy sụp nhanh. Ok-ja trở thành đôi chân, đôi tay và cả trí nhớ của ông.
    • Bà kể lại cho ông nghe về cuộc đời của chính họ, nhưng ông nghe như nghe chuyện cổ tích.
  • Twist cuối cùng (Cú chốt):
    • Luật sư của Cheol-soo tìm đến (người đàn ông mà Ok-ja tưởng là chủ nợ). Ông ta đưa cho Ok-ja một lá thư Cheol-soo viết từ 15 năm trước, ngay ngày ra tòa ly hôn.
    • Nội dung: “Nếu một ngày anh quay về với hai bàn tay trắng, đó là lúc anh đã trả hết nợ đời và chỉ còn lại tình yêu dành cho em. Nếu anh không nhớ em là ai, xin hãy đọc lá thư này cho anh nghe.”
    • Hóa ra, ông đã chuẩn bị cho ngày này từ rất lâu. Ông không về để xin tiền, ông về để chết trong ngôi nhà của mình, bên cạnh người phụ nữ ông yêu nhất.
  • Phân cảnh chia ly:
    • Đêm giao thừa, Cheol-soo có một phút minh mẫn cuối cùng (phản quang hồi chiếu). Ông nhìn Ok-ja, gọi đúng tên bà: “Ok-ja à, anh về nhà rồi.” Sau đó ông qua đời nhẹ nhàng.
  • Kết thúc (Resolution):
    • Đám tang đơn giản nhưng ấm áp. Ok-ja không còn cô đơn hay oán hận.
    • Cảnh cuối: Mùa xuân đến, Ok-ja ngồi trước hiên nhà, uống trà. Bên cạnh là di ảnh của Cheol-soo và chậu hoa ông trồng trước khi mất đã nở bông hoa đầu tiên. Bà mỉm cười: “Cảm ơn mình đã quay về.”
    • Thông điệp: Tình yêu đích thực đôi khi là sự hy sinh thầm lặng mà cả đời người ta mới hiểu được.

콘텐츠 최적화 자료 (유튜브용)

1. 🎬 제목 (Tiêu đề thu hút)

Tiêu đề này tập trung vào sự đối lập của cảm xúc (hận thù và tình yêu), bí mật và twist của câu chuyện.

  • 최종 제목: 67세 이혼 후 재회: “15년간 증오했던 남편이, 시한부 선고와 함께 돌아왔다” (반전 스토리)
  • Dịch nghĩa: Tái ngộ sau ly hôn tuổi 67: “Người chồng tôi hận thù suốt 15 năm đã trở về cùng với án tử hình” (Câu chuyện twist)

2. 📝 설명 (Mô tả chi tiết)

Mô tả tập trung vào việc khơi gợi sự tò mò, nhấn mạnh twist và yếu tố cảm xúc sâu sắc.

설명 내용:

🔔 67세, 그녀의 평화로운 삶이 산산조각 났다.

15년 전, 젊은 여자에게 홀려 떠났던 전남편이 폐인처럼 집 앞에 나타났습니다. 박옥자 여사는 그를 증오했지만, 마지막 인간적인 연민으로 하룻밤을 허락합니다. 하지만 이 재회는 단순한 노인의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숨기고 온 것은 파산이 아닌, 뇌종양 말기 시한부 선고와 목숨을 건 비밀이었습니다.

🔥[반전 핵심]

  • 그의 ‘외도’는 사실 아내를 지키기 위한 위장 이혼이었다.
  • 15년 동안 그가 보낸 생활비와 남기고 간 **’마지막 선물’**의 정체.
  • 기억을 잃어가는 남편, 그리고 남겨진 그의 딸(입양아)과 함께 ‘악의 세력’에 맞서는 옥자 여사의 뜨거운 복수와 용서.

이 이야기는 증오가 어떻게 사랑으로 변하는지,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야 깨닫는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 10분에 공개되는 꽃밭의 비밀은 당신의 눈물샘을 자극할 것입니다.

LoạiNội dung (Keywords & Hashtags)
핵심 키워드 (Keywords chính)67세 이혼, 시한부 남편, 김철수 박옥자, 15년 반전, 노년의 사랑, 가족 드라마, 감성 스토리, 뇌종양, 용서와 화해, 재회
해시태그 (Hashtags)#67세이혼 #시한부 #반전영화 #감성드라마 #한국영화 #노년의사랑 #치매 #슬픈이야기 #가족의의미 #감동실화 (giả định)

3. 🖼️ 썸네일 이미지 프롬프트 (Prompt ảnh Thumbnail)

Prompt này nhằm tạo ra một hình ảnh mạnh mẽ, đối lập (Contrast), tập trung vào nhân vật chính và yếu tố bí mật (chiếc vali/túi).

Thumbnail Style: Cinematic Realism / Emotional Contrast

Yếu tốNội dung (Tiếng Anh)
Main SubjectA Korean elderly woman (60s, determined, eyes filled with both resentment and deep sorrow), standing in a dimly lit, snowy traditional Korean entryway (Hanok style).
Foreground/ActionHer hand is hovering over a slightly opened, black, old-fashioned travel bag/suitcase (symbolizing the husband’s secret/past). She is looking down at the bag.
Background/SettingIn the background, visible through the door, is the silhouette of an elderly man (the ex-husband, Kim Cheol-soo) with a hunched back, shivering in the cold and snow.
Lighting/MoodStrong contrast lighting (chiaroscuro). Warm light from inside the house illuminating the woman’s face and the bag, battling the cold, stark blue light from the outside snow. Emotional intensity, sense of deep conflict and discovery.
Text Overlay (Not in prompt)(Tiêu đề Hàn Quốc) 15년간 증오했던 당신의 비밀
Visual StyleHighly detailed, cinematic, dramatic shadows, realistic photo quality, wide-angle shot.

Final Prompt (Tiếng Anh):

Cinematic realistic photo, high contrast: A determined Korean elderly woman (60s, Park Ok-ja) standing in a warmly lit Hanok entryway, holding open a worn, black leather suitcase. Her expression is a mix of deep resentment and sudden sorrow/discovery. Outside, visible through the doorway, is the stark silhouette of a frail elderly man (Kim Cheol-soo) shivering in a blizzard. Chiaroscuro lighting, warm interior light battling harsh blue exterior light, dramatic shadows. –ar 16:9

Tôi sẽ tạo 50 prompt hình ảnh điện ảnh bằng tiếng Anh, nối tiếp nhau để tạo thành một mạch truyện về sự rạn nứt hôn nhân và tái kết nối trong bối cảnh gia đình Hàn Quốc, theo đúng yêu cầu chi tiết của bạn.

Dưới đây là 50 prompt liên tục, mỗi prompt là một cảnh quay điện ảnh độc lập:

  1. A stunning wide shot of a Korean apartment complex at dawn, a middle-aged Korean man (MIN-HO, 40s) standing alone on a concrete balcony, holding a lukewarm coffee mug, his face shadowed, reflecting the cold blue light of the pre-sunrise sky. Ultra-realistic, cinematic depth of field, real person.
  2. Close-up shot of a Korean woman’s hand (SEO-YEON, 40s) placing a small, worn wedding ring into a polished wooden jewelry box on a minimalist Korean dresser. The focus is sharp on the metal reflection, with her tired face subtly blurred in the background. Ultra-detailed, cinematic grading, natural light.
  3. A tight two-shot of Min-ho and Seo-yeon sitting across a large, empty Korean dining table after a silent dinner. Min-ho avoids eye contact, looking at his distorted reflection on the glossy tabletop. A single, sharp shadow divides the couple. High-resolution, real Korean actors.
  4. An atmospheric shot of a small, traditional Korean bookstore (Seoul or Busan alley) in the evening. Seo-yeon is inside, looking through shelves, her silhouette framed by the warmly lit window. Rain streaks across the glass, symbolizing separation. Super realistic, cinematic bokeh.
  5. A slow tracking shot following Min-ho walking down a long, sterile corridor in a modern Seoul office building. He’s impeccably dressed, but his shoulders are visibly slumped. His figure is small against the overwhelming architecture, conveying emotional isolation. Real Korean person, high detail.
  6. A candid, emotional close-up of the couple’s teenage daughter (JI-YOO, 16) watching her parents argue from the doorway. Only her eyes, wet with unshed tears, are in sharp focus. Her reflection is captured in the polished door handle. Ultra-realistic, shallow depth of field.
  7. A breathtaking landscape shot of a quiet coastal road in Jeju Island. Min-ho’s car is parked at the cliff edge. He is standing outside, gazing at the stormy, grey sea. The wind whips his hair. Cinematic lighting, aerial perspective, real person.
  8. Extreme close-up on a crumpled tissue resting on a faded floral pattern of a Korean traditional bedding (Ibul). A woman’s thumb (Seo-yeon’s) lightly traces the pattern, revealing a moment of quiet, desperate grief. Tactile realism, soft, diffused light.
  9. A high-angle shot looking down at Min-ho and Seo-yeon sitting in a mediator’s office in Gangnam. They are physically close but emotionally distant. The expensive leather chairs and clean lines emphasize their wealth contrasting with their broken state. Real people, detailed texture.
  10. A nostalgic flashback scene: Seo-yeon (younger, 20s) and Min-ho (younger, 20s) laughing together while sharing street food (Tteokbokki) in a crowded Myeongdong market at night. The neon lights create a soft, warm glow around them. High-resolution, vibrant, real Korean couple.
  11. An intimate medium shot of Seo-yeon standing in the kitchen, furiously scrubbing a clean pot. Her knuckles are white, the action revealing suppressed rage and anxiety. The bright kitchen light casts harsh shadows under her eyes. Real person, cinematic color grading.
  12. A long shot of a deserted Ewha Womans University street late at night. Ji-yoo is sitting alone on a stone bench, wearing earbuds, looking lost. The streetlights create long, lonely shadows. Moody, atmospheric, real Korean teenager.
  13. A powerful shot of Min-ho sitting in his car in a heavy downpour outside his own home. He lowers his head onto the steering wheel. The vibrant, distorted reflections of the apartment building lights dance across the wet windshield. Ultra-detailed rain effect.
  14. A candid shot: Seo-yeon is meticulously arranging Kimchi on a Banchan tray in a low-lit traditional market stall (she is helping her mother or working). Her focus is intense, finding peace in repetitive manual labor. Real Korean person, authentic market atmosphere.
  15. A close-up on Min-ho’s hand nervously fiddling with a pen during a phone call, revealing a small, faint scar on his knuckle. The background is blurred, drawing attention only to the restless hand and the slight metallic reflection of the pen. Ultra-high detail, sharp focus.
  16. A cinematic shot of a couple walking separately through a dense bamboo forest in Damyang. Seo-yeon is slightly ahead, Min-ho is lagging. The vertical lines of the bamboo emphasize their separation and isolation. Green cinematic tones, natural light streaming through the stalks.
  17. A tight shot of Min-ho’s eye as he watches a video on his phone. The tiny, intense light of the screen is the only source of light, reflecting the image of a younger Seo-yeon smiling. The rest of his face is in darkness. Ultra-realistic, focus on the eye texture.
  18. A wide shot of Ji-yoo practicing ballet alone in a large, empty dance studio in Seoul. The studio’s mirror reflects her isolated figure endlessly, highlighting her feeling of being alone. Cold, clean light, real Korean teenager.
  19. A medium shot of Seo-yeon standing by the window of a high-rise apartment, looking down at the city lights. A delicate lens flare hits her hair. Her expression is pensive, holding onto hope amidst vast loneliness. Cinematic realism.
  20. A powerful extreme close-up of a broken porcelain teacup (traditional Korean design) lying on the wooden floor. The sharp edges of the fragments reflect the overhead light, symbolizing the irreparable damage to the relationship. Highly detailed texture.
  21. A cinematic overhead shot of Min-ho and Seo-yeon walking on a crowded subway platform in Jongno-3ga Station. They are physically close, but each is looking in a different direction. The movement of the crowd flows around their stillness. Real people, dynamic setting.
  22. A poignant shot of Seo-yeon receiving a forgotten umbrella from an elderly neighbor in the rain. She closes her eyes, the simple act of kindness breaking through her emotional dam. The umbrella is brightly colored against the grey street. Real person.
  23. A medium shot of Min-ho visiting his elderly father in a quiet, sterile hospital room in Daegu. Min-ho’s father is asleep. Min-ho holds his father’s withered hand, finding silent comfort in physical connection. Real Korean people, muted colors.
  24. A scene of escalating tension: Min-ho suddenly slams his fist onto a glass table during a heated discussion with Seo-yeon. Water splashes, distorting the couple’s horrified faces momentarily. High-speed capture, ultra-sharp focus on the impact.
  25. A wide, tranquil shot of a traditional Buddhist temple (Beomeosa or Bulguksa) in the mountains. Seo-yeon is kneeling quietly in prayer, seeking spiritual peace away from her tumultuous life. Soft morning light, atmospheric mist.
  26. Close-up on the reflection of Min-ho’s tearful face in the rearview mirror of his car. He is pulled over on a quiet suburban street at night. The dashboard light illuminates only half his face. High-resolution, strong emotional focus.
  27. A stunning shot of Ji-yoo and her mother, Seo-yeon, sitting on a bench overlooking the Han River at Yeouido. They are sharing ramen from a foil pot, but the moment is strained and awkward. The vast river emphasizes their emotional distance. Real people, authentic setting.
  28. A pivotal medium shot: Min-ho attempts to touch Seo-yeon’s arm during a brief, fragile moment of vulnerability. Seo-yeon flinches, pulling away slightly. The space between their hands is the central focus. High realism, intense emotional weight.
  29. A powerful, cinematic shot of a single drop of water slowly forming on the metallic edge of a Seoul Namsan Tower viewing deck railing, reflecting the blurred city lights below. Symbolizing the single moment of clarity before a breakdown. Ultra-detailed focus.
  30. A low-angle shot of Min-ho and Ji-yoo doing simple gardening in the small backyard of their home. Min-ho tries to engage his daughter, but she remains aloof. The sun casts long shadows, showing Min-ho’s desperate effort to mend connections. Real people.
  31. An atmospheric shot of Seo-yeon walking alone on a wooden trail through the tall grass in Suncheon Bay Ecological Park. The golden sunlight catches the grass, framing her isolated figure in a moment of deep solitude and reflection. Cinematic grading.
  32. A close-up of a handwritten note from Ji-yoo to her mother, slipped under the bedroom door. The note is simple, just a few words, but the paper is slightly damp, suggesting tears. Sharp focus on the ink and paper texture.
  33. A tense medium shot: Min-ho stands outside the glass door of a coffee shop, watching Seo-yeon talking and laughing easily with a male colleague. Min-ho’s figure is partially obscured by the reflections and condensation on the glass. Real Korean people, high drama.
  34. A wide shot of the family on a mandatory family trip to a quiet pension house in Gangwon-do. They are sitting around a campfire at night, but the distance between the three chairs is visibly awkward and symbolic. Dramatic shadows and firelight.
  35. An evocative extreme close-up of Min-ho’s face, his eyes closed, as he receives a phone call with bad news. The veins in his temple are visible due to stress. The background is a stark white hospital wall. Ultra-realistic texture.
  36. A shot capturing the intense, silent moment when Seo-yeon finally confronts Min-ho, her face determined, standing in the middle of their empty living room. Min-ho is pushed back against the wall, defenseless. Strong, dramatic overhead lighting.
  37. A stunning shot of Ji-yoo running across a wide-open field of barley or green tea in Boseong. She is running towards the camera, her expression a mix of anguish and liberation. Natural light, cinematic movement blur.
  38. A close-up on Seo-yeon’s hand nervously holding a car key, her grip so tight her knuckles are white. The metallic reflection of the key chain is sharp, mirroring the cold decision she is about to make. High detail, focused on the tactile sensation.
  39. A medium shot of Min-ho sitting on the floor of Ji-yoo’s room, trying to reassemble a complex, dusty old model airplane. He’s struggling, symbolizing his attempt to fix what is broken. The room is messy, reflecting the family’s disorder. Real person.
  40. A low-angle shot looking up at the couple standing under the iconic Cheonggyecheon Stream lights in Seoul. The stream reflects the cold blue and white lights, creating an ethereal, detached atmosphere around them. Real people, cinematic realism.
  41. A powerful two-shot of Min-ho and Seo-yeon sharing a moment of unexpected, fragile laughter over a silly memory. The laughter is genuine but quickly fades, leaving behind the underlying sadness. Soft, internal house light.
  42. A crucial shot of Min-ho looking at a hidden object—a small, child’s drawing—taped inside an old book. His expression shifts from shock to profound remorse. The detail on the faded drawing is sharp. Ultra-close focus.
  43. A wide, emotional shot of Seo-yeon embracing Ji-yoo tightly at the entrance of Ji-yoo’s school. The mother is seeking comfort from the daughter, reversing the usual roles. Other Korean students walk past, oblivious to the intense private moment. Real people.
  44. A cinematic shot of Min-ho standing at a large, panoramic window overlooking the cityscape of Seoul at night. He is talking on the phone, his face bathed in the scattered light of the city. He looks completely alone and contemplative. Real person, dramatic depth.
  45. An intimate close-up of Seo-yeon’s fingers tracing the faint lines of an old, printed photograph of the family—a moment of deep, painful longing for the past. Focus on the paper texture and her weary hand.
  46. A subtle shot of the couple’s hands accidentally brushing against each other while reaching for the same remote control on the sofa. They both freeze, acknowledging the small, electric connection they still share. Focus on the hands, shallow depth of field.
  47. A pivotal moment: Min-ho and Seo-yeon are finally sitting together on the floor of a brightly lit Gyeongbokgung Palace courtyard (as tourists), having a difficult, honest conversation. The ancient stone walls provide a silent, timeless backdrop to their modern pain. Real people, natural light.
  48. A triumphant medium shot: Seo-yeon is seen smiling genuinely—the first true smile in the film—while walking out of a legal office (or therapy session). The light is bright and warm, signifying a potential breakthrough or decision. Real person, cinematic clarity.
  49. A hopeful, quiet shot of the three family members (Min-ho, Seo-yeon, Ji-yoo) watching a movie together on the sofa. They are still physically separate, but the shared light from the television screen softly connects them. Their expressions are calm but reflective. Real Korean family.
  50. The final shot: A long, serene shot of Min-ho and Seo-yeon walking hand-in-hand along the quiet, misty shoreline of Sokcho beach at sunrise. The tide washes over their feet. They are looking forward, not at each other, symbolizing a fragile but real decision to rebuild. Cinematic color grading, soft lens flare, real Korean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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